삼화사


삼화사SAMHWA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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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진주(眞珠)의 땅에 삼화사가 있으니,
이는 천년의 고찰이다.


사면이 모두 산인데, 서쪽 봉우리는 봉(鳳)이 춤추고 학(鶴)이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고, 남쪽 기슭은 용이 어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를 하고 있다.
그곳은 기이하고 절묘함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그 북쪽에 두타산이 있는데, 웅장하고 위엄있는 기세가 오대산과 더불어 표리(表裏)를 이루고 있으며 시내가 있는데, 이 또한 천고의 뛰어난 경치가 되기에 족하다.
그래서 수령(守令)과 목백(牧伯)들이 바위나 반석에 이름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마치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모여든 것과 같았고, 시인과 묵객들도 모두 계속 아래서 시를 지어 잠깐 사이에 하나의 사원(祠院)을 열었다.
삼화산을 품고 있는 두타산은 예로부터 삼척지방의 영적인 모산(母山)으로 숭상되었다. 동해안에서 보면 서쪽 멀리 우뚝 솟아있는 이 산에서 정기가 내려와 삶의 근원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산세가 웅장하고 골이 깊으며 삼림이 우거져 곳곳에 사찰과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산의 초입에는 1,300년의 신라고찰 삼화사가 있으며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산내에는 거조암, 대승암, 성도암, 은전암, 감로암, 천은사를 비롯하여 10여개의 크고 작은 절들이 이 산의 품에 안겨있다.
두타산에 이렇게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 있는 것은 이 산이 오래 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명승지(名勝地)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산의 이름부터가 불교용어인 ‘두타(頭陀)’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두타(頭陀)라는 말은 원래 범어 ‘dhuta’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으로써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행위, 즉 스님을 의미한다. 두타(스님)의 생활규범은 매우 엄격해서 열두 가지나 된다. 즉 ① 인가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에 머물 것, ② 항상 밥을 얻어먹을 것, ③ 걸식을 할 때는 빈부를 가리지 말고 차례대로 할 것, ④ 하루에 한 끼만 먹을 것, ⑤ 과식하지 말 것, ⑥ 정오가 지나면 과실즙 따위도 먹지 말 것, ⑦ 해지고 낡은 옷을 입을 것, ⑧ 옷은 세 가지 이상 소유하지 말 것, ⑨무덤 곁에 머물며 무상관을 닦을 것, 나무 밑에 머물 것, 공한지에 앉을 것, 항상 앉고 눕기를 삼갈 것 등이다. 출가수행자들을 두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혹독한 수행을 잘 견뎌 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가섭존자는 바로 이 두타행의 일인자였다.
두타산이 이 같은 불교적 의미를 지닌 산명(山名)을 갖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미 범일국사가 이 산에 있는 암자를 삼공암(三公庵)이라 부르게 된 연유가 ‘3선(禪)이 찾아와 수행한 사실’에 연유했다고 한다면 9세기 또는 그 이전에 두타라는 산명이 붙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두타산의 산명이 어디에 연유했든 간에 그 이름은 이 산의 산세와 견주어 생각할 때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느끼게 한다. 삼화사에서부터 이 산의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두타행을 닦는 치열한 수행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산의 모습 자체가 두타승(頭陀僧)처럼 엄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군 하장면과 미로면 사이에 있는 두타산의 높이는 1,350m이다. 태백산맥의 동단부에 위치하면서 동서간의 분수령을 이루는 이 산은 북서쪽으로 청옥산(靑玉山, 1,404m)과 중봉산(中峰山, 1,259m)을 연결하는 험준한 준령을 이루면서 동쪽으로 동해를 굽어보고 있다. 태백 산맥은 이 산에 이르러 한줄기는 북쪽으로 두타산성 줄기를 이루고, 또 한줄기는 동쪽으로 뻗어 쉰움산(五十井山)에서 배수고개로 이어진다. 이러한 산세에 따라 두타산은 그 품속에 천하의 절경을 안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박달골계류와 사원터계류를 모아 이루어 낸 무릉계곡이다. 두타산 동북쪽 용추폭포에서부터 시작해 무릉반석까지 이어지는 4Km의 무릉계곡은 그야말로 절경으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강원도 국민관광지 제 1호로 지정된 무릉계곡은 현재 삼화사 일주문 아래에 있는 무릉반석(武陵般石)에서부터 시작된다. 금란정이라는 편액이 붙은 정자 앞 1,500여 평에 이르는 넓은 반석은 두타산과 청옥산의 정상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맑은 물이 거울에 미끄러지는 구슬처럼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곳은 두타산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반석이 되었다. 〈삼화사고금사적〉에 따르면 “수령(守令)과 목백 (牧伯)들이 이반석 위에 이름을 새겨 놓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마치 조정의 중신들이 늘어선 것 같고 또한 시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문장이 이곳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이 반석에는 특히 주목되는 것은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는 12글자의 서각(書刻)이다. 이 서각은 전하는 말로는 조선 선조 때 강릉부사를 지낸 명필 양사언(陽士諺, 1517~1584)의 글씨라고 한다. 호를 봉래(蓬萊)라고 했던 그는 금강산 만폭동 반석에도 ‘봉래풍악(蓬萊風樂) 원화동천(元化洞天)’이라는 반석 글씨를 남겼다고 하는데 필세를 보면 마치 용이 폭포를 올라갈 듯한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무릉반석을 지나면 바로 삼화사다. 절 앞으로 흐르는 무릉계곡을 따라 조금만 더 오르면 오른쪽으로 그 옛날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 맞은 편으로는 베틀 바위가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서 있다. ‘산빛은 그대로가 부처님의 법신이요 계곡의 물소리가 장광설에 다름 아니다 ’라는 소동파의 시를 생각하며 계곡의 물소리에 취해 계속 올라가면 전설이 깃든 선녀탕과 쌍폭포를 거쳐 용추폭포에 이른다. 세 개의 웅덩이를 거쳐 삼단으로 떨어지는 이 폭포의 하담(荷擔)은 둘레가 30m나 되는 깊은 소(紹)를 이루고 있다. 정조 21년(1797) 가뭄이 들었을 때 삼척부사 유한준이 용추(龍湫)라 새기고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내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후부터 이 폭포는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산중에는 이밖에도 맑은 샘물과 기묘한 바위와 암벽 , 깊고 푸른 못이 수없이 많다. 여기에는 모두 모양에 걸맞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이는 모두 선조 때 부사를 지낸 김효원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타산이 가장 두타산 다울 수 있었던 것은 이토록 빼어난 자연경관 때문만은 아니다. 사시사철 계절따라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이곳의 산색은 어디를 살펴보아도 절이 있어야 어울릴 불연승지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신라의 고승들이 이곳에 와서 삼화사를 개산한 것도 이 산에 절이 들어서야 명산으로서 그값을 다할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던 까닭이다. 참으로 두타산은 삼화사가 이 산에 들어섬으로써 드디어 두타산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두타산과 삼화사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인연으로 세월의 두께를 쌓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적(古蹟)에 이르기를 “자장조사가 처음 당나라를 다녀온 후 본국의 오대산에 돌아와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력하다가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지금의 삼화사)를 창건했다. 이때가 신라 27대 선덕여왕 11년이고, 당나라 연호로는 정관 16년(642)이었다. 절은 관음, 지장, 미타, 나한, 보질도 각 24방이었다. 뒷날 10리 서쪽 중대로 12방을 지어서 옮겼다. 그러나 회양의 재난으로 옛날 삼화사의 연대는 알 수 없게 되었고, 이를 기록한 문헌도 다 증빙할길이 없게 되었다.”
여기서 ‘고적(古蹟)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앞서 살펴본 기록 외에 다른 자료가 더 있다는 것인지 전해 오는 말이 그렇다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화사고금사적》이《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장조사의 전기를 인용하여 창건의 내력을 밝히려 하고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자장율사가 이 절의 역사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은 버릴 수 없다. 아무리 사찰의 역사를 고승에게 가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삼화사의 경우는 자장의 관여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황적 증거가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우선 삼화사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자장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전기에 따르면 말년을 강릉(지금의 평창, 신라 때에는 평창, 강릉, 삼척지역이 다 강릉 관할이었다) 수다사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문수대성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다시 “태백산 갈반지(葛蟠池,淨巖寺)에서 만나자” 는 약속을 한다. 자장은 문수를 만나기 위해 갈반지에 석남원을 짓고 기다렸으나 문수가 거지 행색을 하고 나타나자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문수는 “아상(我相)이 있는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면서 사라졌고, 자장은 문수를 쫓아가다가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장이 문수대성을 만나기 위해 몇 군데를 헤맨다는 사실이다. 이때 자장이 삼화사에서도 초막을 짓고 기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암사사적편(淨巖寺事蹟篇)〉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자장은 귀국 후 황룡사와 월정사에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이어 대화사(大和寺)와 사자산에 사리를 봉안했다. “이후 법사는 재차 대화사에 머물고 있는데 홀연히 범승이 나타나 ‘그대를 태백산에서 다시 보리라’ 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는 자장이 수다사에 있다가 태백산 갈반지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암사사적편〉은 대화사에 있다가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보다 신빙성 있는 자료로 본다면 정암사쪽의 기록은 무엇인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기록, 특히 고승의 기록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래서 향인(鄕人)의 기록도 때로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대화사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그냥 착오로만 단정할 일은 아니다. 《삼국유사》가 빠뜨린 기록을 사찰의 사적기가 적어 놓을 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대화사’가 과연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자료상 자장이 관여한 절로는 울산에 있는 ‘태화사(太和寺)’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절은 자장이 중국의 태화사를 모방해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장이 강릉의 수다사를 떠나 문수대성을 기다렸다는 절로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오히려 태백산에서 가까운 삼화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삼화사고금사적》에 나오는 〈자장조사전기〉를 보면 하나의 윤곽이 떠오른다.
(자장은) 문수를 친견하기 위해 삼척주의 두타산에 찾아가서 삼화사지에 이르러 초암을 짓고 3일간 머물렀다. 이때 산음이 침침해서 열리지 않으므로 그 형세를 살피지 못하고 떠나갔다가 후에 다시 와서 팔척방을 창건하여 7일 동안 머물렀다. ……뒤에 큰 소나무 밑에 (지금의 학소대 아래) 한 거사가 홀연히 나타나 말하기를 “예전에 했던 약속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하고는 사라졌다. 스님은 그가 범승의 화현임을 알고 즉시 태백산으로 돌아가 기다렸다.
자료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삼화사고금사적》은 〈정암사사적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정암사쪽의 기록은 자장이 머문 곳을 ‘대화사’로적고 있는 반면 삼화사쪽의 기록은 ‘삼화사’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삼화사쪽의 기록이 훨씬 구체적이다. 이들 자료의 상관성과 동이(同異)관계는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추적하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즉, 자장은 태백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타산 삼화사에 머물렀는데, 〈정암사사적〉을 기록하는 사람이 이를 대화사로 기록했을 가능성이다. 삼화사 창건에 자장이 관여했다는 기록이 사중(寺中)에 남아 있는 한 이 기록은 그렇게 해석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시기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현재 정암사를 비롯한 월정사, 삼화사등 자장이 관여한 사찰의 창건연대는 한결같이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기록자들의 착오가 보인다. 선덕여왕 11년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한해 전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2년(정관17, 643)에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 구층탑을 완성한다. 진덕여왕 4년(650)에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토록 건의하고 한해 전에는 중국식 제도에 따라 관복을 입도록 건의한다. 자장의 전기는 그 뒤 나이가 더 든 말년에 강릉 수다사에 머물다가 문수대성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산 등을 유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 11년, 즉 한 해 동안 삼화사를 비롯한 영동지방 사찰들을 창건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의 귀국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정관 17년이고, 또 경주에서 대국통으로 활약한 사실이 마지막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진덕여왕 4년(650)이라면 그 이전에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했다면 그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아 있는 650년 이후라야 가능하다. 이는 앞으로도 더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삼화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이밖에도 또 하나 검토해 볼 자료가 있다. 이는 자장이나 범일과 같은 인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삼화사가 처음 터를 잡던 때의 설화에서 연유한다. 우선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산의 네 곳을 연꽃으로 표시했다. 즉, 동쪽을 청련대라 했으며 서쪽을 백련대라 했다. 그리고 북쪽은 흑련대라 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 서역에서 약사여래 삼형제가 와서 머물렀는데 큰형(伯)은 삼화사에 있었으며 가운데(仲)는 지장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막내(季)는 궁방에 있었다.
이때가 범일국사가 굴산사로 오기 22년 전인 신라 흥덕왕4년(829)이라는 것이 《강원도지》의 기록이다. 《삼화사고금사적》은 이 설화를 좀더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이다.
고적에 말하기를 약사삼불은 본래 서역으로부터 동해를 지나 일편(一片) 석주(石舟)에 실려 와서 본국에 이르렀는데 가장 큰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지녔고, 두 번째는 푸른 연꽃을 지녔고, 세 번째는 금색 연꽃을 지녔다. 하나는 흑련대(삼화사)에 있고, 하나는 청련대(지상촌)에 있으며, 하나는 금련대(영은사)에 있었다. 혹은 이르기를 세 부처님이 탔던 용신이 변하여 암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앞에서 살펴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즉 승람은 “신라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여기에 모여 회생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강원도지》는 이를 보다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삼화사고금사적》은 보다 구체적으로 삼선(三禪)과 삼불(三佛)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들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은 “삼(三)자”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도지에는 삼선이라든가 삼불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승람에서는 삼신인(三神人)이 머물렀다 해서 삼공암(三公庵)이라 했다로 적고 있다. 이러한 일치는 우연이기보다는 하나의 설화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 사찰명이 삼화사로 바뀌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화사가 삼공암이란 이름 대신 삼화사로 개명되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초의 일로, 그 사연은 앞에서 인용한 그대로 “신성왕(神聖王, 고려태조)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화사 사명(寺名)의 유래를 밝히는 단서가 된다. 지금까지의 검토에 의하면 삼화사 창건연대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했다는 7세기설이고, 또 한가지는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개창했다는 9세기설이다. 마지막으로는 흥덕왕 때 창건됐다는 설이있다. 이중 세 번째 설은 신화적 요소가 많은 데다가 창건관계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또 이 관련설화는 범일창건설의 전사적(前史的) 성격이 강하므로 범일창건설과 같은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삼화사의 창건은 자장에 의해서냐 범일에 의해서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중 하나만 취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두 자료 사이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자료를 취하고 어떤 자료를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두 가지 자료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다. 즉 삼화사 창건에 최초로 관계가 있는 인물로는 가장 연대가 앞서는 자장을 택하고,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사굴산문이 명주를 중심으로 번창하는 과정에서 범일의 중창, 또는 삼화사의 사굴산문 편입으로 보는것이다. 여기서 자장을 취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사전(寺傳)자료에 대한 신빙성이다. 삼화사가 17세기경 무려 다섯 차례나 사사를 정리하면서 자장을 창건주로 확정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범일이나 자장이 모두 당대에 존경받는 고승이었으므로 삼화사가 범일의 창건을 굳이 자장으로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사전자료들이 그때로서는 ‘고적’이나 ‘고로(古老)들의 구전설화’를 취재해서 집필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자장창건, 범일중창의 사사기록에 대한 신빙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초창의 연대를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검토했듯이 이때는 자장이 귀국하기 전이다. 자장이 영동지방 사찰창건에 관계한다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최종기록인 진덕여왕 4년(650) 이후라야 한다.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국가적 존경과 귀의를 받던 자장이 영동지방으로 옮겨온 것은 그의 인생이 황혼기로 접어든 650년 이후의 말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건시기의 상한선을 아무리 올려 잡는다 해도 삼화사 창건은 650년 이전이 될 수는 없다.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 볼때 삼화사가 동해지방의 유수한 사찰로 기초를 닦은 것은 신라 진덕여왕 4년(650) 이후 자장율사에 의한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삼화사가 처음부터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절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작은 토굴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삼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을 사굴산문으로 편입되는 문성왕 13년(851)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삼화사는 ‘삼공암(三公庵)’이라는 최초의 사명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삼화사는 명주 사굴산문의 수사찰로 사세를 거듭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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