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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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철조 노사나불에 얽힌 설화 (보물 제1292)
삼화사에는 신라 때부터 모시고 있는 철불이 1좌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부처님은 약사삼형제불로 서역에서 석주(石舟)를 타고 동해로 와 두타산에 앉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서역도래설은 동해안 일대의 사찰에서 몇 군데 더 나타난다.

이를테면 금강산 건봉사에는 53불이 들어왔는데 서역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경주의 기림사는 천축의 광유화상이 불상과 제자를 데리고 와서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는 동해안지방 사찰들의 불연(佛椽)이 멀리 인도에 닿아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방편설화라 할 것이다. 삼화사 철불의 도래설도 이런 맥락 가운데 하나로 보이지만 이로 인해 지방주민들의 종교적 신심 또한 매우 두터웠던 점은 이 도래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추측케 한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에 기록된 철불의 유래와 그 뒤에 생긴 설화를 정리한 것이다.
옛날 두타산이 절터를 열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삼척의 정라진 포구에 석주(石舟)가 한 척 정박했다.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는 배였지만 스스로 미끄러지듯 밸길을 따라 바다를 가르고 포구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정박했다. 배가 멈추자 선복에서는 잘생긴 육척장신의 대장부 세 사람이 내렸다. 세 사람의 얼굴은 모두 금빛으로 빛났으며 몸에는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의 손에 연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었는데 큰혀응로 보이는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둘째는 푸른 연꽃을, 셋째는 금색 연꽃을 들고 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서역에서 온 약사불 삼형제였다.
약사불 삼형제는 곧장 서쪽으로 우뚝 솟은 두타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큰형으로 보이는 약사불이 걸음을 멈췄다. 좌우로 산세를 둘러보니 검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도를 닦고 중생을 제도할 만한 길지(吉地)였다. 형이 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터를 잡겠다. 이곳은 천하의 명산이니 둘러보면 너희들이 머물 곳도 있을 것이다. 각각 터를 잡은 후 다시 만나자."
이렇게 하여 큰형은 삼화촌에 자리를 잡았다. 둘째가 터를 잡은 곳은 야트막한 구릉이 있는 지상촌이고, 셋째는 그 보다 조금 떨어진 궁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삼형제가 자리를 잡자 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삼형제는 모두 변설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해 곧 이들을 교화해 제자로 만들었다. 제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약사불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큰형의 절은 흑련대, 둘째는 청련대, 셋째는 백련대라 했다.
삼형제는 때가 되면 흩어져 사는 형제를 찾아가 서로 위로하고 공부한 바를 토론하기로 했다.두 아우가 형이 있는 곳으로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오면 형은 예를 다해 이들을 맞이하고 고준한 담론을 나누었다. 따라온 무리들은 이들의 담론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졌다. 또 얼마가 지나면 이번에는 둘째의 집으로 방문하고, 다음은 셋째의 집을 하는 식으로 돌아가며 방문했는데 그 우애가 지극했다. 이렇게 교화활동을 펴던 약사삼불은 사람들의 인심이 순화되고 불심이 깊어지자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날 때임을 알았다. 어느 날 형은 동생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정화되어 부모에 경순하고 형제끼리는 우애하며 이웃 간에는 화목하니 더 이상 교화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아직 다른 곳에 있는 중생들은 마음이 거칠어 우리의 교화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제 곧 다른 곳으로 떠나자. 그러나 우리가 떠난 뒤 세월이 한참 더 지나면 인심이 다시 황폐해 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기는 하되 등신불(等身佛)을 남기고 가자. 그리하면 사람들이 그 등신불을 보고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을 기억할 것이다. 등신불은 세세토록 변하지 않도록 철불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
형의 말을 들은 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약사삼형제는 어느 날 철불로 등신을 남기고 두타산을 떠났다. 약사삼형제가 갑자기 사라지자 이들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은 각각 스승이 있던 곳에 절을 지었다. 큰형이 있던 삼화촌 흑련대에는 삼화사를 짓고, 둘째가 머물던 지상촌 청련대에는 지상사를 지었다. 그리고 셋째가 머물던 궁방촌 백련대에는 영은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철불에 공양을 하면서 세세생생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부모에 효순하며 형제끼리는 우애하며 이웃과는 화목하게 살았다.
그로부터 강산이 수없이 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약사불이 머물며 가르친 인륜과 도덕을 조금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철불을 친견할 때마다 불심은 더욱 깊어지고 마음은 더욱 맑아졌다. 사람들은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 마다 절로 찾아와 부처님을 친견하고 이런저런 속내를 털어놓았다. 약사불은 등신불이지만 살아 있는 생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믿음은 약사불과 사람들 사이를 보이지 않는 끈끈한 하나의 끈으로 묶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철불에 얽힌 수많은 영험설화가 생겨났다. 다음은 그 가운데 몇 가지다.
삼화사 아랫마을에 사는 한 농부의 아내가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왔다. 온 마을에 전염병에 창궐해 남편이며 자식이 다 죽게 생겼으니 빨리 낫게 해 달라고 빌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올리고 남편과 식구들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전염병은 좀처럼 퇴치되지 않았다. 평소에 약사불을 집안의 어른처럼 공경하고 지내 온 아낙은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이 어찌 내 정성을 몰라주나 싶었다.
그녀는 생각 끝에 부처님이 평소에 잡숴 보지 못했을 것을 가지고 가서 공양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부처님이 평소 쌀밥이며 과일은 많이 드셨겠지만 고기는 한 번도 못 드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태 한 마리를 사서 절로 가지고 갔다. 아낙은 스님 몰래 법당으로 들어가서 소원을 빌고 명태를 부처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그런데 아낙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남편이며 자식들이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다른 집 부인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금방 온 마을에 전염병이 물러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참이 지났다. 이웃 마을에 사는 어떤 새댁은 시집을 와서 아이를 갖지 못해 애를 태웠다. 그녀는 이웃 마을 어떤 아주머니가 삼화사 약사불에게 기도를 해서 영험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절로 찾아가 기도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댁이 아주머니를 찾아가 "어떻게 기도를 해서 소원성취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웃으며 새댁에게 슬그머니 이런 귀띔을 해주었다.
“부처님도 색다른 음식을 좋아한단 말일세, 그러니 명태를 한 마리 가지고 가서 공양을 올리게. 만약 그래도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삼화사 부처님이 고기만 받아 자시고 소원을 들어주지 않더라고 소문을 내버려. 그러면 부처님이 난처해서라도 어떻게 해줄 게 아닌가.”
새댁은 아주머니의 말대로 명태를 실타래에 꿰어서 부처님 목에 걸어 놓고 소원을 빌었다.
“부처님, 만약 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삼화사 부처님이 고기를 자셨다고 소문을 내겠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할 겁니다.”
이렇게 불공을 하고 나자 새댁은 정말로 임신을 해서 옥동자를 낳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때부터 소원이 많은 사람들은 스님 몰래 법당에 들어가 명태를 올려놓고 기도를 했다.
그러면 열의 아홉은 소원이 성취되었다.

삼화사 철불의 영험담은 이밖에도 많다. 조선 순조 때의 일이다. 어느 해 산불이 일어나 절이 몽땅 불에 타는 재앙을 입었다. 법당은 다 타고 철불만 동그라니 남아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불손한 생각으로 철불을 훔쳐서 달아났다. 철불을 지고 몇 발자국 움직이자 어디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대성발악을 했다. 도둑은 혼비백산해 철불을 내려놓고 도망을 쳤다. 그 후 또 다른 어떤 도둑이 철불을 훔치러 왔다. 그는 철불이 워낙 무거워 전체를 가지고 갈 수 없자 무도하게 한 쪽 팔을 잘라 도망을 가다가 신장(新粧)으로부터 죄를 받아 입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 뒤늦게 불상이 없어진 것을 안 삼화사 스님들이 부처님의 없어진 팔을 찾아 이리저리 산속을 헤매다가 이를 발견하고 다시 모셔와 법당을 새로 짓고 봉인해 놓았다. 이 얘기는 <진주지>에도 실려 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해 장마가 들어 산사태가 일어나 중대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약사전이 무너지고 약사불도 매몰되고 말았다. 삼화사 약사불은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자 중대사로 옮겨 지으면서 이곳에서 모셔 두었는데 중대사가 무너지면서 매몰된 것이었다. 그 뒤 이 약사불은 중대사 터에서 밭을 일구던 어떤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삼화사로 옮겨졌다. 삼화사에 철불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나자 어느 날 한 골동품장사가 찾아와 철불을 팔라고 했다. 당시 삼화사 주지는 성암 화상이었고 신도회장은 김대승 씨였다. 김대승 씨는 부처님을 골동품으로 매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골동품상은 스님 몰래 철불을 훔쳐 가마니에 싸서 묵호로 가지고 나갔다. 그 골동품상은 운임이 모자라 철불을 역에 맡기고 돈을 구하러 영주로 갔다.
이때 신이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묵호에 주재하고 있던 어떤 기자의 꿈에 가마니에 싸인 철불이 보였다. 그는 꿈속의 일이 신기해 역으로 나갔더니 과연 가마니가 보였다. 기자가 역무원에게 물으니 화물을 맡긴 사람이 운임을 구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경찰에 연락을 해서 철불을 지키고 있던 고물상의 아내를 취조하게 했더니 훔친 것으로 판명되었다. 철불을 훔친 골동품상은 영주에서 돈을 마련해 돌아왔다가 아내와 함께 철장으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철불은 다시 삼화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삼화사 철불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견디며 지금도 그 옛날 훤한 장부의 모습으로 두타산에 처음 올 때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귀의와 존경을 받으며 법당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어찌 부처님의 영험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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