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화사


삼화사SAMHWA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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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진주(眞珠)의 땅에 삼화사가 있으니,
이는 천년의 고찰이다.


사면이 모두 산인데, 서쪽 봉우리는 봉(鳳)이 춤추고 학(鶴)이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고, 남쪽 기슭은 용이 어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를 하고 있다.
그곳은 기이하고 절묘함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그 북쪽에 두타산이 있는데, 웅장하고 위엄있는 기세가 오대산과 더불어 표리(表裏)를 이루고 있으며 시내가 있는데, 이 또한 천고의 뛰어난 경치가 되기에 족하다.
그래서 수령(守令)과 목백(牧伯)들이 바위나 반석에 이름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마치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모여든 것과 같았고, 시인과 묵객들도 모두 계속 아래서 시를 지어 잠깐 사이에 하나의 사원(祠院)을 열었다.

두타산 삼화사가 소재한 강원도 동해시는 1980년 4월 1일에 태어난 도시다.


21세기 환동해경제권의 중심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균형 있는 국토 개발과 새로운 동해안시대를 개척하겠다는 국가계획에 따라 기존의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통합하여 신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동해시가 20세기에 와서 어는 날 갑자기 탄생된 것은 아니다. 이곳에 신도시가 들어서기까지는 무려 2천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의 산맥과 세월의 물줄기가 굽이쳐 흘렀다. 오늘의 신도시는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동해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지석묘와 마제석검, 무문토기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1천 년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지역이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2세기초 ‘실질국(悉直國)’의 이름이 나타나면서부터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왕(婆裟王) 23년(102) 8월조 기사는 당시 이 지역에 실직국이라는 부족국가가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무렵 실직국의 영역은 남쪽으로 영덕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나 파사왕 23년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이후 이 지역은 신라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실직국이 신라와 쟁패하면서 싸웠던 마지막 전쟁터는 지금도 남아 있는 두타산성(頭陀山城)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지증왕 6년(505) 지방제도의 정비에 따라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파견했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쟁패하는 상황에서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는 고구려와 신라가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음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선덕여왕 8년(639)에는 진주도독부(眞珠都督府)로 승격시켰다. 삼화사가 최초로 개창된 것은 이보다 20~30년 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을 통일한 뒤 통일신라는 지방제도를 중국식으로 정비하게 되는데, 신문왕 5년(685)까지 확립된 9주제에 따라 이 지역은 하서주(河西州)에 편입된다. 하서주는 명주(溟州)를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 9개의 군(郡)과 25개의 현(縣)을 관장하는 지방정부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은 성종14년(995)에 정비된 12절도사제(節度使制)에 따라 척주(陟州)로 바뀌면서 중앙에서 단련사(團鍊使)가 파견된다. 다시 현종 때는 5도양계(道兩界) 제도로 지방조직이 바뀌면서 영동지방은 동계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의 동해시가 명주와 삼척 양쪽의 관할을 받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지방은 세조 3년 (1457) 진(鎭)이 설치되면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아래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에 속했다. 현대에 이르러 이 지역은 1955년 강릉이 시(市)로 승격되자 명주는 따로 군(郡)으로 분리되었다가 1980년 삼척의 북평읍과 명주의 묵호읍이 통합되어 동해시로 승격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이 지방에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많은 준재를 배출해 냈다. 고려 충렬왕 때 간관(諫官)이자 시인인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 1244~1300)가 외가 고장인 이곳에 머물며 삼화사에서 불경을 빌려 읽고 를 쓴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또 임진왜란 때는 관군과 의병들이 삼화사의 병참지원을 받으면서 두타산성에 들어가 결사항전으로 왜군과 싸운 사실도 이 지방에서는 큰 자랑거리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수한 인재를 중앙정부에 진출시키고 유교적 문화를 배경으로 독특한 향토문화를 만들어 낸 것도 주목된다. 조선 선조때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金孝元)을 배향하고 있는 경행서원 (景行書院), 숙종 때 삼척부사였던 이세필(李世弼)을 배향하고 있는 용산서원(龍山書院)은 이 지방의 관리나 주민들로부터 한 번도 배척받은 일이 없었다. 오히려 지방관리나 주민들은 역사적으로 삼화사와 매우 친화적이었다. 삼척부사 김효원이 남긴 〈두타산일기〉는 두타산을 유람하면서 스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일과 함께 삼화사가 훼손된 사실을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슷한 내용은 이 지방 유학자들이 두타산을 둘러보고 쓴 다른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삼화사가 쇠락하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거나 스님들에 대한 우호적인 표현을 남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찰이 불에 타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적극적으로 중창불사에도 참여한다. 이는 이 지방에서 불교와 유교가 대립하기보다는 조화로운 발전을 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역민들의 향토에 대한 사랑도 남달라 특기할 만하다. 80세에 정승을 한 유명한 허목(許穆, 자는, 1595~1682)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 (1662) 이 지역의 인문과 역사를 정리한 〈척주지(陟州誌)〉를 지어 남긴 것을 비롯해 김종언(金宗諺)의 〈척주지〉·〈삼척군지〉·〈진주지〉등 향토지가 무려 5종이나 된다. 이는 지역민들의 향토애를 짐작케 하는 자료라 할 것이다. 이들 향토지에는 삼화사가 언제나 내고장의 자랑스러운 절로 소개되고 있다. 반대로 허목이 남긴 〈두타산기〉는 삼화사지에 전재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삼화사가 동해시의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친화적인 사찰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고적(古蹟)에 이르기를 “자장조사가 처음 당나라를 다녀온 후 본국의 오대산에 돌아와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력하다가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지금의 삼화사)를 창건했다. 이때가 신라 27대 선덕여왕 11년이고, 당나라 연호로는 정관 16년(642)이었다. 절은 관음, 지장, 미타, 나한, 보질도 각 24방이었다. 뒷날 10리 서쪽 중대로 12방을 지어서 옮겼다. 그러나 회양의 재난으로 옛날 삼화사의 연대는 알 수 없게 되었고, 이를 기록한 문헌도 다 증빙할길이 없게 되었다.”
여기서 ‘고적(古蹟)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앞서 살펴본 기록 외에 다른 자료가 더 있다는 것인지 전해 오는 말이 그렇다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화사고금사적》이《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장조사의 전기를 인용하여 창건의 내력을 밝히려 하고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자장율사가 이 절의 역사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은 버릴 수 없다. 아무리 사찰의 역사를 고승에게 가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삼화사의 경우는 자장의 관여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황적 증거가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우선 삼화사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자장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전기에 따르면 말년을 강릉(지금의 평창, 신라 때에는 평창, 강릉, 삼척지역이 다 강릉 관할이었다) 수다사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문수대성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다시 “태백산 갈반지(葛蟠池,淨巖寺)에서 만나자” 는 약속을 한다. 자장은 문수를 만나기 위해 갈반지에 석남원을 짓고 기다렸으나 문수가 거지 행색을 하고 나타나자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문수는 “아상(我相)이 있는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면서 사라졌고, 자장은 문수를 쫓아가다가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장이 문수대성을 만나기 위해 몇 군데를 헤맨다는 사실이다. 이때 자장이 삼화사에서도 초막을 짓고 기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암사사적편(淨巖寺事蹟篇)〉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자장은 귀국 후 황룡사와 월정사에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이어 대화사(大和寺)와 사자산에 사리를 봉안했다. “이후 법사는 재차 대화사에 머물고 있는데 홀연히 범승이 나타나 ‘그대를 태백산에서 다시 보리라’ 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는 자장이 수다사에 있다가 태백산 갈반지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암사사적편〉은 대화사에 있다가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보다 신빙성 있는 자료로 본다면 정암사쪽의 기록은 무엇인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기록, 특히 고승의 기록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래서 향인(鄕人)의 기록도 때로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대화사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그냥 착오로만 단정할 일은 아니다. 《삼국유사》가 빠뜨린 기록을 사찰의 사적기가 적어 놓을 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대화사’가 과연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자료상 자장이 관여한 절로는 울산에 있는 ‘태화사(太和寺)’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절은 자장이 중국의 태화사를 모방해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장이 강릉의 수다사를 떠나 문수대성을 기다렸다는 절로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오히려 태백산에서 가까운 삼화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삼화사고금사적》에 나오는 〈자장조사전기〉를 보면 하나의 윤곽이 떠오른다.
(자장은) 문수를 친견하기 위해 삼척주의 두타산에 찾아가서 삼화사지에 이르러 초암을 짓고 3일간 머물렀다. 이때 산음이 침침해서 열리지 않으므로 그 형세를 살피지 못하고 떠나갔다가 후에 다시 와서 팔척방을 창건하여 7일 동안 머물렀다. ……뒤에 큰 소나무 밑에 (지금의 학소대 아래) 한 거사가 홀연히 나타나 말하기를 “예전에 했던 약속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하고는 사라졌다. 스님은 그가 범승의 화현임을 알고 즉시 태백산으로 돌아가 기다렸다.
자료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삼화사고금사적》은 〈정암사사적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정암사쪽의 기록은 자장이 머문 곳을 ‘대화사’로적고 있는 반면 삼화사쪽의 기록은 ‘삼화사’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삼화사쪽의 기록이 훨씬 구체적이다. 이들 자료의 상관성과 동이(同異)관계는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추적하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즉, 자장은 태백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타산 삼화사에 머물렀는데, 〈정암사사적〉을 기록하는 사람이 이를 대화사로 기록했을 가능성이다. 삼화사 창건에 자장이 관여했다는 기록이 사중(寺中)에 남아 있는 한 이 기록은 그렇게 해석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시기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현재 정암사를 비롯한 월정사, 삼화사등 자장이 관여한 사찰의 창건연대는 한결같이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기록자들의 착오가 보인다. 선덕여왕 11년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한해 전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2년(정관17, 643)에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 구층탑을 완성한다. 진덕여왕 4년(650)에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토록 건의하고 한해 전에는 중국식 제도에 따라 관복을 입도록 건의한다.
자장의 전기는 그 뒤 나이가 더 든 말년에 강릉 수다사에 머물다가 문수대성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산 등을 유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 11년, 즉 한 해 동안 삼화사를 비롯한 영동지방 사찰들을 창건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의 귀국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정관 17년이고, 또 경주에서 대국통으로 활약한 사실이 마지막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진덕여왕 4년(650)이라면 그 이전에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했다면 그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아 있는 650년 이후라야 가능하다. 이는 앞으로도 더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삼화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이밖에도 또 하나 검토해 볼 자료가 있다. 이는 자장이나 범일과 같은 인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삼화사가 처음 터를 잡던 때의 설화에서 연유한다.
우선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산의 네 곳을 연꽃으로 표시했다. 즉, 동쪽을 청련대라 했으며 서쪽을 백련대라 했다. 그리고 북쪽은 흑련대라 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 서역에서 약사여래 삼형제가 와서 머물렀는데 큰형(伯)은 삼화사에 있었으며 가운데(仲)는 지장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막내(季)는 궁방에 있었다.
이때가 범일국사가 굴산사로 오기 22년 전인 신라 흥덕왕4년(829)이라는 것이 《강원도지》의 기록이다. 《삼화사고금사적》은 이 설화를 좀더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이다.
고적에 말하기를 약사삼불은 본래 서역으로부터 동해를 지나 일편(一片) 석주(石舟)에 실려 와서 본국에 이르렀는데 가장 큰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지녔고, 두 번째는 푸른 연꽃을 지녔고, 세 번째는 금색 연꽃을 지녔다. 하나는 흑련대(삼화사)에 있고, 하나는 청련대(지상촌)에 있으며, 하나는 금련대(영은사)에 있었다. 혹은 이르기를 세 부처님이 탔던 용신이 변하여 암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앞에서 살펴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즉 승람은 “신라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여기에 모여 회생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강원도지》는 이를 보다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삼화사고금사적》은 보다 구체적으로 삼선(三禪)과 삼불(三佛)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들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은 “삼(三)자”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도지에는 삼선이라든가 삼불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승람에서는 삼신인(三神人)이 머물렀다 해서 삼공암(三公庵)이라 했다로 적고 있다. 이러한 일치는 우연이기보다는 하나의 설화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 사찰명이 삼화사로 바뀌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화사가 삼공암이란 이름 대신 삼화사로 개명되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초의 일로, 그 사연은 앞에서 인용한 그대로 “신성왕(神聖王, 고려태조)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화사 사명(寺名)의 유래를 밝히는 단서가 된다.
지금까지의 검토에 의하면 삼화사 창건연대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했다는 7세기설이고, 또 한가지는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개창했다는 9세기설이다. 마지막으로는 흥덕왕 때 창건됐다는 설이있다. 이중 세 번째 설은 신화적 요소가 많은 데다가 창건관계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또 이 관련설화는 범일창건설의 전사적(前史的) 성격이 강하므로 범일창건설과 같은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삼화사의 창건은 자장에 의해서냐 범일에 의해서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중 하나만 취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두 자료 사이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자료를 취하고 어떤 자료를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두 가지 자료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다. 즉 삼화사 창건에 최초로 관계가 있는 인물로는 가장 연대가 앞서는 자장을 택하고,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사굴산문이 명주를 중심으로 번창하는 과정에서 범일의 중창, 또는 삼화사의 사굴산문 편입으로 보는것이다. 여기서 자장을 취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사전(寺傳)자료에 대한 신빙성이다.
삼화사가 17세기경 무려 다섯 차례나 사사를 정리하면서 자장을 창건주로 확정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범일이나 자장이 모두 당대에 존경받는 고승이었으므로 삼화사가 범일의 창건을 굳이 자장으로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사전자료들이 그때로서는 ‘고적’이나 ‘고로(古老)들의 구전설화’를 취재해서 집필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자장창건, 범일중창의 사사기록에 대한 신빙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초창의 연대를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검토했듯이 이때는 자장이 귀국하기 전이다. 자장이 영동지방 사찰창건에 관계한다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최종기록인 진덕여왕 4년(650) 이후라야 한다.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국가적 존경과 귀의를 받던 자장이 영동지방으로 옮겨온 것은 그의 인생이 황혼기로 접어든 650년 이후의 말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건시기의 상한선을 아무리 올려 잡는다 해도 삼화사 창건은 650년 이전이 될 수는 없다.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 볼때 삼화사가 동해지방의 유수한 사찰로 기초를 닦은 것은 신라 진덕여왕 4년(650) 이후 자장율사에 의한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삼화사가 처음부터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절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작은 토굴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삼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을 사굴산문으로 편입되는 문성왕 13년(851)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삼화사는 ‘삼공암(三公庵)’이라는 최초의 사명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삼화사는 명주 사굴산문의 수사찰로 사세를 거듭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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