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 삼화사 사적비 > 자료실


커뮤니티SAMHWASA TEMPLE

자료실
  • home
  • 커뮤니티
  • 자료실

삼화사 | 두타산 삼화사 사적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7-31 16:26 조회2,433회 댓글0건

본문

두타산 삼화사 (頭陀山 三和寺)

 

삼화사는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창건한 사찰이다.

9세기 후반 조성된 철조 노사나불 좌상의 명문이 삼화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늦어도 9세기 무렵에는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사찰이었으며, 조선 초에는 태조의 명으로 1395년부터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을 위한 국행 수륙재가 열렸던 곳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조선 후기 중창했으며, 이후 옛 삼화사 터와 중대사 터를 반복하며 옮겨 다니다가 197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최근 원래 삼화사가 있던 절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신라~고려시대의 삼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옛 기록에는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찰의 연혁에 대해 14세기 승려인 석식 영암(釋息影庵)의 기록을 인용하며 태조 왕건과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그들이 간 후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으며, 얼마 뒤 사굴산(闍堀山)의 품일(品日)이 이곳에다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태조 왕건이 조칙을 내려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인 삼화사(三和寺)로 고쳤다고 하여 삼화사라는 사명의 유래를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연결하였고, 나말여초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사굴산문의 개조 품일(品日), 즉 범일국사와도 연결지어 신라 하대 선종 사원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삼화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통일신라 하대 삼화사의 연혁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이다. 삼화사 철불의 명문에 의하면 삼화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9세기 후반 화엄업(華嚴業) 승려 결언 대덕(決言大德)이 왕명으로 철불을 조성한 것으로 이해되므로, 9세기 화엄종 사찰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1631(인조 9) 삼화사의 연혁을 정리하여 편찬한 두타산삼화사고금사적(頭陀山三和寺古今事蹟)에는 당시까지 전해지던 삼화사와 관련된 전설과 기록들을 모았는데, 이 사적기에서는 읍지(邑誌) 등을 인용하여 642(신라 선덕여왕 11)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고 하였다. 또 고적(古蹟)에 전하는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 · () · ()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石舟를 타고 돌아다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 둘째는 청련(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靑蓮臺),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 · 지상사 · 영은사라고 하는 전승도 기록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조선 후기 정리된 삼화사 관련 사적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나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다만 삼화사는 늦어도 고려 후기에는 삼척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를 유지하던 사찰이었고, 태조 왕건과의 전승 등이 고려 후기 삼화사의 위상이나 중요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14세기 전반에는 이승휴가 삼척에 은거하며 10여 년 동안 삼화사에서 불서를 빌려 읽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삼화사

1395(태조 4)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한 공양왕을 위한 국행 수륙재를 태조의 명으로 삼화사에서 지내게 되면서 삼화사는 조선 초 중요한 사찰로 부상하였다. 1394년 조선 건국 세력들은 공양왕 부자를 유배지인 삼척에서 죽이고 강화와 거제에 유배 가 있던 왕씨들을 처형했는데 그 이듬해 태조의 명으로 삼척 삼화사, 개성 관음굴, 거제 견암사에서 일 년에 2회 국행 수륙재를 지내 이들의 명복을 빌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세종이 36개의 사찰만 공인할 때 삼화사는 포함되지 못하였다. 한편 1577년 김효원(金孝元)이 쓴 두타산 기행문에는 삼화사 옛터에 건물 한 채와 철불 2구가 있는데, 이 중 불상 하나는 오른쪽 다리가 잘려 있었다고 하며, 1661년 삼화사를 찾은 허목의 글에서는 당시 삼화사가 폐사가 되어 가시덩굴 우거진 속에 허물어진 탑과 철불만 있다고 하였다. 1747(영조 23) 옛터에서 조금 위로 절을 옮겨 지었고, 1820(순조 20) 화재가 나서 1824년에 중건하였으며, 1829년 다시 불타자 정원용(鄭元容) · 이기연(李紀淵) · 이광도(李廣度) · 윤청(尹晴) 등이 서로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869(고종 6) 화운 덕추(華雲德秋)가 단청을 하였고, 1873(고종 10) 선당(禪堂)을 세웠으며, 1896년 학송(鶴松) · 창명(彰明) 등이 승당(僧堂)을 지었다.

 

근현대의 삼화사

이처럼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 오다가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왜병(倭兵)들이 방화하여 대웅전 · 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으며, 19798월에 무릉계반(武陵溪盤) 위쪽으로 절을 옮겨 중건하였다.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약사전(藥師殿) · 요사채 · 삼성각 · 육화료(六和寮) · 큰방 · 천왕문 · 일주문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1기를 비롯하여 운암당상준대사부도(雲巖堂尙俊大師浮屠)와 원곡당대선사부도(元谷堂大禪師浮屠) 및 비()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은 창건 설화와 관련된 약사삼불 가운데 맏형의 불상이라고 전해지며, 삼층 석탑은 높이 4.95m로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Tel. 033-534-7661~2Fax. 033-534-7546템플스테이 문의. 033-534-7676동해불교대학. 033-534-7663요양원. 033-522-0500
Copyright ⓒ samhwasa templ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