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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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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발 작성일12-03-13 07:54 조회5,0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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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상식

종교의 필요성
오늘날 과학문명의 발전은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은 생활의 편이를 제공하지만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혀 주지는 못합니다. 과학문명은 환경 파괴와 재해를 안겨주고 핵무기 개발로 엉청난 재앙 가능성으로 인류에게 불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과학문명은 물질적인 욕망은 충족시킬 수 있지만 올바른 삶을 살아 갈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올바른 종교는 참된 삶의 길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문명도 풀지 못하는 생사를 초월하는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하여 종교는 필요한 것입니다.

올바른 종교의 선택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는 저마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참된 진리임을 주장하고 자기가 믿지 않는 종교는 배타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가 그럴싸한 교리를 내세워 신자들을 모우고 금품을 갈취하고 가정을 파탄 시키고 사회적 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그러면 올바른 종교란 무엇일까요? 건전한 사회윤리의식 선과악의 인과법칙이 있는 종교 지혜롭게 사는 진리의 종교 대중과 더불어 함께 하는 종교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자기종교와 타종교를 차별하지 않는 종교 그리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진리를 일깨워 주는 종교여야 합니다.

불교란 어떤 종교인가?
불교(佛敎)란 불타(佛陀)의 교훈(敎訓)이며 불타(佛陀)에 依해서 說해진 敎法이다. 그리고 부처가 되는 것을 말씀하신 교훈입니다. 불교는 윤리적 철학사상과 종교적 신앙실천을 겸비한 세계적인 고등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부처님(석가모니)을 개조로 하여 우려려 신봉하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우상을 버리고 신에 잘못 바진 마음을 미신을 타파하는 종교입니다.불교는 무아를 깨달아 생명의 실상을 보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삶의 일체 허상의 번뇌를 깨달아 열반의 세계에 드는 종교입니다.

삼보의 정의
삼보(三寶)란 불(佛).법(法).승(僧)을 말 합니다. 불교(佛敎)란 불(佛).법(法).승(僧)의 삼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불교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삼보(三寶)가 존재하고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신자에게는 최초이자 최후이기 때문에 입니다. 귀의삼보(歸依三寶)란 불교신자에게는 어떠한 시대, 어떠한 지역의 불교에서도 대승(大乘).소승(小乘)을 불문하고 귀의삼보(歸依三寶)가 가장 중시됩니다.

삼귀의문(三歸依文)
1.귀의불(歸依佛)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buddham saranam gacchami)
2.귀의법(歸依法) 거룩한 가름침에 귀의 합니다.(dhammam saranam gacchami)
3.귀의승(歸依僧) 거룩한 승가께 귀의 합니다. (sanng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부처님은 불타(佛陀) buddha를 말하며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더없이 뛰어난 부처님 이라하고 스스로 깨치고 남을 깨치게 하며 깨침의 행이 원만 완성된 성자입니다. 역사적인 교주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우주와 인생의 최고의 진리를 깨닫고 완성된 삶으로 사신분입니다. 지금부터 약2544년전 인도의 가비라국의 태자로 탄생하셨습니다. 태자의 이름을 싯타르타라 하였습니다.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어 유년시절을 보낸 젊은이로 성장한 싯닷르타는 생.노.병사의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쳐 고뇌하던 중 29세에 출가수행자가 되었습니다. 태자는 6년간 수행끝에 35세때 네란자라 강변의 보리수 아래서 깊은 명상에 샛별이 뜨는 것을 보고 크나큰 깨달음을 이루어 진리의 완성된 부처님이 되셨습니다.부처님은 깨달음의 지리에 눈뜬 이를 의미합니다.

불상에 예배드리는 까닭
우리가 불상에 예배 드리는 것은 물체인 불상이 아니라 부처님의 덕과 진리를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덕과 진리를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 예배 드린다는 것은 곧 인간의 존엄성 내지는 생에 대한 외경의 발로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우주만유의 진리를 깨치신 당체로써 그 위덕이 승엄하여 그 모습에 경배하는 것이며 또 예배함으로써 마음 속의 아만심을 꺽고 겸허의 덕을 배우며 스스로 심성을 정화하는 수행의 과정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인류에게 빛이 되어 주심에 감사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이며 절을 하는 것은 예의입니다.

불상에 예배하는 것은 우상숭배?
불교에서 불상에 예배하는 것은 무언가의 현세적인 이익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닙니다.불교는 어디까지나 인생에 깃들어 있는 궁극적인 의미를 각자의 노력으로 깨달아 이해함으로써 완성된 삶으로나아갈 것을 일깨우는 종교입니다. 불상을 모시는 것은 그와 같은 길을 처음으로 열어 보이셨고 스스로 그 길로 나아가신 부처님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불상을 모시지 않아도 부처님의 높으신 덕과 위대한 성품을 되새기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만, 불상은 그러한 부처님의 위신력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우리들의 믿음을 도와줍니다. 우리들은 원만하고도 자재하신 부처님의 모습을 우러러봄으로써 마음의 평화와 평정, 침착함을 얻으며 위대한 스승이 우리들 마음 속에 살아 계심을 느낍니다. 또한 불상에 경배하고 정성껏 공양함으로써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더욱 수행에 매진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상으로 표상되는 불교의 영원한 이상에 귀의하는 것인 불상에 예배하는 참뜻입니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위로는 열심히 수행정진하여 스스로 석가모니 부처님께 성취하신 바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하여 참된 지혜와 자비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처님을 본받아 스스로의 완성된 삶을 추구해 나감과 아울러 이웃에도 일깨워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각성된 사회, 다시말해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어가는 것,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불자들이 항상 간직해야 할 마음가짐과 생활태도
우선 첫번째로 삼보에 대한 예경심과 더불어 삼보를 수호하는데 앞장서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및 불교교단은 우리 불자들 모두의 귀의처이자마음의 보루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불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삼보 수호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불자들은 정기적으로 법회에 참석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불서들을 읽는 생활을 일상화해야 하겠습니다. 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도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므로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정기적으로 수입 중 일정액을 사찰이나 자선기관에 보시하는 생활을 체질화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사찰은 신자들의 희사금에 의해 운영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은 이들에게 전해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찰의 활발한 활동을 위하여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넷째, 스스로 배워 익히고 깨달아 아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웃에게도 베푸는 생활을 습관화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이웃에 전하는 노력에 의해 생명력을 지니며, 그로 말미암아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정토세계의 구현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란?
부처님이란 인도의 옛말 붓다에서 온 우리말로, 본래는 깨달은 이, 진리에 눈뜬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한자로 번역할 때 소리나는 대로 옮겨 불(佛) 또는 불타(佛陀)라고 하기도 했고 뜻으로 옮겨 각자(覺者) 등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영원하고도 보편 타당한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이가 부처님이고, 그로 인해 완성된 삶으로 나아간 이가 부처님입니다. 또한 누구나 그와 같은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으며, 실제로 불교에서는 일찍이 인류역사속에 실재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부처님들이 계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들이 일반인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옛부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위대한 덕성을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해서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별명으로 설명해왔습니다. 즉 첫 번째는 여래(如來)로서, 이와 같이 온 이, 다시 말해 부처님은 진리로부터 오신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두 번째 응공(應供)은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이이며, 세 번째 정변지 (正偏)知)는 바르고 보편 타당하게 아는 이라는뜻입니다. 네 번째 명행족(明行足)은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이, 다섯 번째 선서(善逝)는 깨달음의 세계로 잘간 이를 뜻합니다. 여섯 번째 세간해(世間解)는 세상을 잘 아는 이, 일곱 번째 무상사(無上士)는 더없이 높은 분을 의미합니다. 여덟 번째 조어장부(調御丈夫)는 사람들을 올바르게 길들이는 이, 아홉번째 천인사(天人師)는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번째 불세존(佛世尊) 은 깨달은 어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상과 덕성을 갖추고 중생들의 제도에 힘쓰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 그분은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전 인도의 동북부 지방 히말라야 기슭에 있던 한 작은 나라인 카필라밧투의 태자로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연로한 숫도나왕이었고 어머니는 마야 부인이었습니다. 태자가 태어날 당시 카필라밧투의 국민들이 태자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태자의 이름을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싯닷타라고 지었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생모인 마야 부인이 태자를 낳은지 이레만에 돌아가시고 이모 마하파자파티부인의 손에 의해 양육되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총망받는 젊은이로 성장한 싯닷타태자는 이윽고 생.노.병.사라는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쳐 심각하게 고뇌하던 끝에 29세 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과 부모처자를 버리고 출가수행자가 되기로 결심하셨습니다.그것은 유한한 인생의 현실에서 벗어나 참다운 삶의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후 6년간 당시의 전통적 수행방법인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에 피나는 노력을 경주했지만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태자는 35세 때 마침내 두 가지 수행을 모두 포기하고 네란자란 강변의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던 중 샛별이 뜨는 것을 보고 크나큰 깨달음을 이루어 진리의 완성자 곧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신부족인 사캬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고, 부처님은 깨달은 이, 진리에 눈뜬 이를 의미합니다.

천상천하유하독존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설화에는 태자가 탄생한 직후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을 걸은다음 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우렁찬 목소리로 천상천하유하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유명한 선언을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한다는 이 이야기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부처님의 전기를 전하는 경전 가운데는 이상과 같은 구절 다음에 삼계개고오당안지(三界皆苦吾當安之)라는 구절이 이어지는 것도 있습니다.즉 온 세상이 모두 괴로움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에 담겨 있는 의미를 말 그대로 풀이해보면 부처님과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분은 어디에도 없으며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세상 사람들을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건지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
경전의 말씀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셨든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되셨으며, 그것은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緣起)의 이치였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팔상성도
먼저 첫 번째는 도솔내의상(도率來儀相)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본래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계시다가 적당한 때가 되자 이 세상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으로, 룸비니동산에서 마야 부인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비람이란 룸비니를 뜻합니다. 세 번째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으로, 태자 시절에 성문 밖으로 유람 나갔다가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깨닫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네 번째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으로, 한밤중에 카필라밧투성을 떠나 출가수행자가 되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다섯 번째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으로, 출가수행자가 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히말라야 산속에서 6년간 수도하신 것을 일컫습니다. 여섯 번째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으로,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명상 끝에 드디어 우주와 인생의 최고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부처님의 성도가 임박하자 마왕이 무리를 이끌고 나타나 수행을 방해했는데 마왕을 굴복시킴으로써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일곱 번째는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으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를 상대로 최초의 설법을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쿠시나라의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에서 입멸 즉,열반(涅槃)에 드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는 민간설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사람들 사이에 유포되게 되었습니다. {자타카혹은 {본생담(本生譚)이라고 불리 눠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부터 왕이나 왕자, 수행자 상인 등의 인간만이 아니라 원숭이,앵무새,비둘기,코끼리등 동물로까지 바꿔 태어나면서 온갖 미담과 선행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어렵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교리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는 다른경전들에 비해 옛날이야기식으로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인과응보(因果應報)나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가르침을 일깨우는 이 이야기들은 따라서 일방민중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그 양도 대단히 많아졌습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법?
불교에서는 법(法)혹은 법보(法寶)라고 해서 진리를 부처님 및 교단과 더불어 삼보의 하나로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법 즉, 진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불교에서 쓰는 법이란 말은 인도의 옛말 다르말을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소리나는 대로 옮길 때는 달마(達磨)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란 다름 아닌 이 세상이 이와 같이 유지될 수 있는 근본이치 즉, 법이었습니다.또한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에 의하면 이 세상 만물은 모두 그와 같은 법칙을 근거로 존립하는 것일 뿐 독자적인 실체를 지닌 것이 아니므로 사물이나 존재, 본성따위도 불교에서는 법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도 그러한 진리였고 부처님이 권장하신 바른 길, 착한 행위도 그와 같은 진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법은 진리 이외에도 사물이나 존재, 본성, 올바른 행위, 부처님의 가르침 등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자의 법(法)자가 물 수 (水)자와 갈 (去)자를 합쳐서 흐르는 방향 즉, 자연의 순리를 의미하듯 불교의 진리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불교는 진리를 신봉하는 종교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영원하고도 보편 타당한 절대이치로서, 그것은 부처님이 계시든 계시지 않든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적 인격체인 부처님은 단지 그 진리를 깨달은 이로서,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그러한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입장입니다. 진리를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진리를 본다.'부처님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에 의해 사시는 분으로서, 우리들의 진정 귀의하고 예배해야 할 대상은 부처님의 육신이 아니라 부처님이 당신의 삶으로 구현하고 계시는 진리 그것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삼법인
불교에서 예로부터 그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을 삼법인(三法印)이라 하여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해왔습니다. 즉 그 첫 번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서, 이 세상 모든 현상은 덧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으로서, 우리도 언젠가는 죽어갈 것처럼 일체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 불교의 첫 번째 진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로서, 세상만물에는 독자적인 실체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일체개고 (一切皆苦)로서, 모든 것은 괴롭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의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 삼법인이라 하는 경우도 있고 네 가지 모두를 들어 사법인이라 하는 경우도 있는데,이때의 열반적정이란 불교에서 가르치는 이상적인 경지인 열반만이 모든 고통이 사라진 참으로 고요하고안은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사성제
인간 삶의 유한한 현실을 직시하며 그와 불완전한 상황에서 벗어나 보다 옳은 삶, 보다 가치있는 인생을 성취하기 위한 가르침인 불교는 그 실천원리를 사성제(四聖諦)라고 해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경전에 의하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네 가지 진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네 가지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고성제(苦聖諦)로서, 말하자면 괴로움에 관한 진리입니다. 즉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 등 우리 인생은 온통 괴로움 투성이라는 것이 첫 번째 진리입니다. 두 번째는 집성제 (集聖諦)로,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입니다. 즉 이 세상이 이와 같이 괴로운데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갈애 (渴愛)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갈애란 타는 듯한 목마름과도 같은 집착을 뜻하는데, 현실의모든 것들은 일정한 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거기에 끈질기게 집착하고 그로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는 멸성제(滅聖諦)로, 괴로움이 소멸에 관한 진리입니다. 즉 괴로움은 갈애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갈애만 없애면 괴로움은 자연히 소멸하여 영원히 평안하고 안락하며 아무런걸림이 없는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경지를 열반(涅槃)이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도성제(道聖諦) 입니다. 괴로움이 소멸된 이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서, 그것은 여덟 가지 바른 길 즉 팔정도(八正道)를 이야기합니다.

팔정도
팔정도(八正道)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수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첫 번째는 정견(正見)입니다. 올바른 견해를 뜻하는 것으로서, 인생의 현실이나 사물의 이치에 대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불교수행의 첫 번째 덕목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사(正思)입니다. 올바른 생각을 뜻하며, 특히 마음으로 짓는 탐욕과 분노의 어리석음의 세 가지 악업을 제거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정어(正語)입니다. 올바른 말을 뜻하는 것으로서 입으로 짓는 거짓말과 이간질, 욕설, 아부등 네 가지 악업을 소멸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는 정업(正業)입니다.올바른 행동으로서, 몸으로 짓는 살생과 도둑질, 음행의 네 가지 악업을 소멸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섯 번째는 정명(正命)입니다. 올바른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특히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가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올바른 직업을 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는 정정진(正精進)입니다. 올바른 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가짐을 지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정념(正念)입니다. 올바른 기억을 의미하며 옳은 생각들을 잊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여덟 번째는 정정(正定)입니다. 올바른 정신집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삼매(三昧)의 수련을 통해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수행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올바른 참선이나, 염불 기도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학
아무런 걸림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불교의 수행입니다.그와 같은 수행방법들은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즉,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세 가지 수련을 그 기본원리로 하고 있습니다. 계율이란 일생생활 속에 지켜야 하는 자발적인 도덕규범들로 재가신자들이 받아 지니는 오계(五戒)를 위시한 십선계(十善戒) 등을 이야기합니다. 다음에 선정이란 좌선(坐禪)과 같은 정신집중의 수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래 선정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인 요가의 일종으로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고 의식을 한 곳으로 통일시키는 수련 법입니다. 이같은 수행은 특히 산란한 마음이나 동요된 마음, 분노따위를 제어하여 마음속에 지혜를 일으킬 터전을 마련합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는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기르는 수행으로, 우리 몸이나 감각 등에 대해 덧없고 괴로우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관찰하고 연기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면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근거
{열반경}에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제각기 불성(佛性)이라는 것이 있다는 뜻에서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고 있는데, 바로 그 불성 때문에 수행을 하면 누구나 이상적인 경지 즉,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은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에 부처님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이란 뜻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뿌리깊은 번뇌 때문에 그와 같은 자기 자신의 본래 면모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므로 중생이고 부처님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는 것입니다. 중생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도 중생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진리 때문이며 그와 같은 영원 불변의 진리가 바로 불성인 것입니다.

사무량심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의해 완성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웃에게는 특히 자(自).비(悲). 희(喜).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자무량심이란 자애로운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끝없이 어질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야 함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비무량심은 슬퍼하는마음을 가리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처럼 여기는 것으로, 진리에 미혹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을 애처롭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희무량심이란 기뻐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웃의 기쁜 일을 사심없이 함께 기뻐해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무량심이란 평등한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흔히 불교는 자비(慈悲)의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이 설 하신 바도 자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육바라밀
불자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이야기합니다. 여섯가지 완전한 수행을 뜻하는 것으로서,그 여섯 거지란 보시(보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입니다.보시바라밀이란 남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예로부터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라 하여 세 가지 보시를 권장하고 있는데 재물이나 가르침을 베푸는 것과 아울러 남을 두려움에서 구해주는 덕행을 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지계바라밀은 계율을 준수하는 것으로, 특히 계율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효율적으로 지혜롭게 운용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세 번째의 인욕바라밀은 욕된 것을 참고 견디는 자세를 말합니다.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아무리 참기 힘든 것도 인내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네 번째의 정진바라밀은 끊임없이 노력을 뜻합니다. 스스로의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쉼 없이 한 길을 가는 용감한 자세를 일컫는 말입니다. 다섯 번째의 선정바라밀은 정신집중의 수련을 이야기합니다. 정신을 한 곳에 모으는 수행을 통해 어지럽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킴으로써 언제나 동요됨이 없는 삶에 자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의 반야바라밀은 지혜가 완성된 생활을 뜻합니다. 사물의 참다운 이치 즉, 연기의 이법을 올바로 터득해 아무데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슬기로운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교구단의 구성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칠부대중이란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 사미(沙彌).사미니(沙彌尼).식차마나(式叉摩那)의 일곱 분류를 일컫고,사부대중은 그중에서 미성년자를 뺀 비구. 비구니 우바새.우바이만을 지칭하지만 보통은 칠부대중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일반을 통틀어서 비구란 출가한 성년의 남자스님을 뜻하고 비구니란 여자스님을 뜻합니다. 또 우바새란 재개의 남자신자를 의미하는 말로 청신사 (淸信士)라고도 하며, 우바이는 재가의 여신자로 청신녀(淸信女)라 합니다. 사미니란 출가는 했지만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은 20세 미만의 남자를 말하며, 사미니는 구족계를 받지 않은 18세 미만, 식차마나는 18세에서 20세 사이의 여성 출가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일종의 견습생으로, 사미와 사미니는 10계를 지니고 식차마니는 정학녀(正學女)라 해서 6법계를 지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십대제자
첫 번째는 사리풋타로, 우리들의 사리불(舍利弗)또는 사리자(舍利子)라고 하는 분입니다. 지혜가 특히 뛰어났던 분이라 지혜제일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마하갈라나로, 목건련(目楗連) 또는 목련(目連)이라 알려진 분입니다. 신통력이 뛰어났으므로 신통제일이라고 하는데, 효성이 지극 해서 어머니를 지옥에서 제도한 유래로 유명합니다. 세 번째는 마하캇사파로, 대가섭(大迦葉)또는 그저 가섭(迦葉)이라 합니다. 금욕적인 생활이 뛰어났으므로 두타 제일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아누룻다 즉, 아나율(阿那律)입니다. 수행을 너무 열심히 하다 눈이 먼 일화로 유명한데, 안보고도 아는 신통을 얻었으므로 천안제일이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는 수부티 즉, 수보리 (須菩提)입니다. 연기설을 잘 이해했으므로 해공제일이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는 푼나 만타니풋타 즉, 부루나 (富樓那)입니다. 일곱 번째는 마하캇챠나 즉, 가전연(迦전延)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서 설명하는데 뛰어나 분별제일이라 합니다. 여덟 번째는 우팔리 즉, 우바리 (優波利)로, 계율을 잘 지켜 지계제일이라 합니다. 아홉번째는 라훌라 즉, 라후라(羅喉羅)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친아들로, 밀행 제일이라 합니다. 그리고 열번째는 아난다 즉,아난(阿難)으로,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며 설법을 가장 많이 들어 다문 제일이라 합니다.

스님들의 동안거와 하안거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음력10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일년에 두 차례를 각각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라고 해서 스님들이 산문 출입을 자제하고 수행에만 정진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이와 같은 안거제도는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유래된 것이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기후조건에 따라 여름 석달과 겨울 석달 동안을 안거 기간으로 삼게 되었는데, 이같은 안거를 시작하는 것을 결제(結制)라 하고 끝내는 것을 해제(解制)라고 합니다

스님들의 호칭
선사.종사,율사 등의 의미 조사(祖師), 종사(宗師), 선사(禪師), 율사(律師), 법사(法師) 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조사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정통의 법맥을 이어받은 덕이 높은 스님들을 일컫는 말이었고, 종사란 한 종파를 일으켜 세운 학식이 깊은 스님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선사란 오랫동안 선을 수행하여 선의 이치에 통달한 분을 지칭하는 말이며 법사란 경전에 통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스님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님들의 탁발 유래
스님들의 저자거리의 집들을 방문하여 쌀이나 약간의 금품따위를 동냥하는 것을 탁발(托鉢)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걸인들의 구걸행위와는 엄연히 다른 것으로 , 오직 수행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는 수단이었던 만큼 거기에는 엄격한 규칙들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루에 오전 중에 정해진 시간에만 행해야 한다거나,민폐를 줄이기 위해 하루에 일곱 집씩을 방문하여 조금씩 얻어서 모은다거나, 가난한 집과 부유한 집을 차별하지 않고 차례대로 방문한다거나, 탁발을 유도하는 어떠한 행위도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또 가르침을 대가로 공양을 받아서는 안되고 먹다남은 것을 보관해두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는 탁발 그 자체가 수행자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잠재우는 수행의 하나였을 뿐 아니라 재가신자들에게 복덕을 위한 출가자들의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현재의 조계종에서는 종헌 종법으로 탁발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성직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기는 어느 해를 기준으로 해서 헤아리나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불기(佛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즉,돌아가신 해를 기준으로 해서 헤아리는 것으로서,올해가 불기 2544년이라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올해로서 2544년째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교는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나
우리나라에서 맨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17대왕인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즉, 372년의 일입니다. 이해 6월에 중국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인 전진 (前秦)의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스님으로 하여금 불상과 경전을 보내옴으로써 공식적인 불교의 전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어서 2년 후에는 아도(阿道) 라는 스님이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라는 최초의 사찰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한편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제15대 침류왕(沈流王)원년 즉, 384년 9월에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온 것이 그 처음입니다. 그리고 신라에서 불교가 처음 공인된 것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직후인 제23대 법흥왕(法興王) 14년 즉, 527년의 일입니다.

한국불교를 빛낸 스님
우리 불자들이 꼭 기억해둘 만한 분들을 꼽아본다면 우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승랑(僧朗)과 담징(曇徵), 백제의겸익(謙益)과 혜총(慧聰), 신라의 원광(圓光)과 자장(慈藏),대안(大安)스님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승랑은 일찍이 중국으로 건넌가 상당한 학술적 성과를 이룬 부이고, 담징과 혜총은 일본에 불교와 함께 많은 문화를 전수하신 분이며, 겸익은 인도까지 가서 경전과 율장을 가지 고와 번역한 분입니다. 그리고 원광은 세속오계를 설해 화랑도 정신의 기초를 제공한 분이고, 자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만들고 신라 불교의 기틀을 다진 분이며, 대안은 민중교화에 매진하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는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원측(圓測),혜초(慧超)스님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원효는 교학의 발전과 민중교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고, 의상은신라 화엄종의 효시가 되는 분이며, 원측은 중국에서 활약한 학술적인 업적이 뛰어난 분이고, 혜초는 인도에 유학하여 {왕호천축국전}이라는 기행문을 남긴 분입니다. 한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의천(義天)과 지눌(知訥), 일연(一然) 및 휴정(休靜), 유정(惟政)스님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천태종의 창시자이고, 보조국사 지눌은 정혜결사를 일으켜 수해의 풍토를 진작시킨 분이며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어 민족정기를 선양한 분입니다. 또한 서산대사 휴정은 사명대사 유정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나라를 지켰을 뿐 아니라 교단의 기풍을 쇄신시킨 분입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삼신불
삼신불이란 부처님에게는 그성격상 법신(法身).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는 세 가지 몸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여기에서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본질 내지는 기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법신이란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근거는 그 깨달으신 진리에 있으므로 진리가 바로 부처님의 본질이라는 입장입니다.

비로자나부처님
비로자나부처님(毘盧자那佛)은 다리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라고도 쓰고 줄여서 노사나불(盧舍那佛)또는 자나불 (자那佛)이라고도 하는데 이와 같이 여러 이름을 지니고 있는 비로자나부처님은 {화엄경}과밀교경전들의 교주인 법심불 (法身佛)로서, 말하자면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영원무변하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당체로 하는 부처님입니다. 이같은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보통 화엄경(華嚴殿), 비로전(毘盧殿) 또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아미타부처님은?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은 다른 말로 무량수불(無量壽佛)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하는데,{아미타경}이나 {무량수경} {관무량수경}등에서 주로 설해지고 있는 부처님입니다. 유명한 48대원을 세우고 오랜 동안 수행을 쌓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서 부처님이 되신 것으로, 현재는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 극락(極樂)이라는 곳에서 가르침을 베풀고 계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극락이란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에 이해 세워진 불국토로서, 다른 말로 안양국(安養國) 또는 안락국(安樂國)이라고도 하며 온갖 죄악이나 괴로움이 없는 청정하고 평안하며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진 전각은 무량수전(無量壽殿),극락전(極樂殿)등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미륵부처님
미륵부처님(彌勒佛)은 먼 훗날 이 땅에 출현하셔서 중생들을 제도하실 미래세의 부처님으로, 지금은도솔천에서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미륵이란 인도의 옛말 마이트레야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사랑 ,우정. 자애등을 의미하던 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우리는 용화전(龍華殿), 미륵전(彌勒殿),자씨전(慈氏殿)이라고 합니다.

약사여래부처님
약사여래부처님(藥師如來佛)은 보다 갖추어진 이름으로는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이라고 하는데, 동방으로 갠지스강 모래알 수의 열배에 해당하는 국토를 지나 정유리정토(淨琉璃淨土)라는 곳에계신다고 합니다. 대의왕(大醫王)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모든 이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중생들에게 온갖 현세이익을 베푸는 구제불(救濟佛)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약사여래부처님으로서, 이 부처님을 사찰에 모실 때는 보통 약사전(藥師殿)이라는 전각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함께 모시며 손에 약병을 들고 계신 모습이 특징입니다.

관세음보살
대중들과 가장 친근한 분이라면 단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같은 관세음보살은 달리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 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 또는 줄여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 도 합니다. {법화경} (보문품}에 의하면 이 보살의 이름을 특히 관세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언제나세간의 소리를 관찰하고 계시기 때문으로, 갖가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그에 따라 33거지 응화신으로 나타나서 즉시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천수(千手),십일면(十一面), 백의(白衣),수월(水月), 여의륜 (如意輪)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모셔지고 있는데, 이는 대상에 따라 다양한관세음보살의 구제활동을 제각각 형상화 시켜낸 것입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은 원통전(圓通殿), 대비전(大悲殿), 관음전 (觀音殿)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문수보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양옆에 모시기도 하고 때로는 비로자나부처님의 좌우에 모시기도 하는 보살로, 말하자면 각기 지혜와 행원(行願)이라는 부처님의 두 가지 커다란 덕성을 상징하는 분입니다. 문수보살을 사찰에 모실 때는 손에 칼을 들고 있거나 사자를 타고 있는 형상을 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번뇌를 단호하게 끊어 버리는 칼이나, 용맹과 위엄의 상징인 사자를 통해 지혜의 준엄한 성격을 암시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한편 보현보살은 달리 변길(遍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분인데,주로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향한 실천행의 의지 즉, 행원을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지혜와 실천이라는 두 가지 이상을 통해 대승보살도의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과 대세지보살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다른 이름으로 지지보살(持地菩薩), 묘당보살(妙幢菩薩) 또는 무변심보살(無邊心菩薩)이라고도 하며 {대승대집지장십륜경}{지장보살본원경} {점찰선악보경}드에서 주로 설해지고 있는 보살입니다. (지장십륜경 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미륵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실 때까지 육도윤회의 현실세계에 몸을 나투어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위촉받은 분이라고 합니다. 흔히 지옥에서 텅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유명한 이 보살에게는 따라서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닙니다. 특히 지옥중생들과 관련하여 명부전(冥府殿)이나 지장전(地藏殿)의 본존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부처님 옆에 모셔지기도 합니다.

사찰이란 어떤 곳이며 어떻게 성립되었나
사찰(寺刹)은 다른 말로 절 도량(道場), 가람(伽籃)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을 모시고 예배드리는 곳일 뿐 아니라 스님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수행하는 곳이고 또 불교의 대중적인 교화활동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의 입장에서 사찰은 불.법.승의 삼보가 깃들어 있는 신성하고 거룩한 신행의 요람이자 불법 전승과 전파가 이루어지는 소중한 터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찰 입구에 있는 일주문의 의미
우리들이 사찰에 찾아가는 경우 절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문을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합니다만, 일주문이란 기둥이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두 개 혹은 네 기둥을 일직선상으로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어 만든 문이 일주문으로서 여기서부터 서원 경내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둥을 일직선상으로 세운 것에는 사찰의 경계임을 표시하는 이외에도 일심(一心)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오로지 진리에 귀의하는 한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같은 일주문에는 일반적으로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 안으로 들어와서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세간의 알음알이로 해석하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천왕문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
우리나라의 사찰에는 갑옷에 투구를 쓰고 험상궂은 얼굴로 칼이나 창 따위를 무시무시한 형상들이 세워진 문이 있는데, 이것은 천왕문(天王門)으로서 거기에 모셔진 사천왕(四天王)은 온갖 삿된 세력들로부터 사찰을 지키는 분들입니다. 다시 말해 사천왕은 본래 인도의 고대신화 속에 등장하는 귀신들의 왕으로서 각기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을 관장한다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역할을 자원했기 때문에 이처럼 사찰 입구에 세워지게 됐다고 합니다.

탑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나
사찰에 모셔져 있는 탑(塔)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이 유골을 봉안했던 인도의 스투파에서 유래된 것으로, 탑이라는 명칭도 스투파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 탑파(塔婆)의약칭입니다. 다시말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45년간의 중생제도를 마치고 입멸하시자 재가신자들이 부처님을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스투파를 세웠는데,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추모하기 의해 건립한 일종의 무덤같은 것이었습니다. 재가신자들은 그곳에다 예배를 하고 고양을 올렸습니다.

법당은 어떤 곳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
우리들은 법당(法堂)이라고 하면 흔히 본존이 모셔져 있는 그 사찰의 중심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실제 불상이나 보살상을 모신 전각을 법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려시대에 선종이 성행하면서 부터이며 고려 초까지만 해도 부처님을 모신 곳은 금당(金堂)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금당이란 부처님을 금인(金人)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금구(金口)라고 하듯이 부처님이 모셔진 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아직도 법당이란 말보다 금당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부처님 뒤에 모시는 탱화에 종류
탱화란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위시한 수많은 성현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모셔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각을 통해 입시적으로 조성된 불.보살상에 비해 평면적인 회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 탱화를 모시는 것도 본질적으로 불.보살상을 모시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불,보살상의 뒤편에 모셔져 앞에 모신 불,보살상을 장엄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불.보살상만으로는 미처 다 표현해내기 어려운 불교의 상징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탱화로서, 우리 불자들의 입장에서는 탱화를 통해 불. 보살의 장엄한 국토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찰에 있는 여러 가지 전각
일반적인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서, 대웅(大雄)이란 부처님의 별명이기 때문입니다. 또 대웅전과 비슷한 것으로 대웅보전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울러 아미타부처님과 약사여래부처님을 함께 모십니다. 한편 법신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은 비로전,화엄전,대적광전 등으로 부르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건물은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은 용화전,미륵전 등으로 부르고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곳은 약사전이라고 부릅니다.보살들의 경우에도 관세음보살이 본존일 때는 관음전, 광명전,대비전,원통전 등으로 불리우고, 지장보살이 본존인 때는 지장전 명부전 등으로 부르는데, 특히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함께 명부의 시왕을 같이 모신 곳이므로 시왕전이라고도 합니다.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산신령을 모신 산신각, 용왕을 모신 용신각.칠성님을 모신 칠성각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토속신앙이 불교에 포섭되어 지어진 건물들입니다.

법당 안의 신중단의 의미
불법을 옹호하는 성중들을 모신 신중단에는 호법성중, 화엄성중,혹은 신장이라 불리우는 신중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보통 법당 안에 부처님을 모신 곳 옆에 자리잡은 신중단에는불법을 옹호는 착한 사람을 돕고자 발심한 선신들과 함께 불자들을 돕고자 서원력으로 화신을 나투신 성현들이 자리하십니다. 그 가운데 팔대금강신장은 발심한 성현이고, 제석천이나 사왕천, 대범천 등은 이 땅을 평화롭게 지키고자 하는 천상의 성중들이며 ,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등 팔부신장은 신부의 성중입니다. 그밖에많은 호법신선들이 있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불법을 옹호하며 착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염주는 어떻게 사용하며 어떤 것들이 있나
염주는 수주(數珠)라고 하며 염불할 때나 진언을 외울 때,또는 절을 할 때에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오늘날 염주는 번뇌를 끊는 도구 즉. 수행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염주 하나를 굴림에 따라 부처님 광명이 자신에게 충만해지고 죄업이 소멸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염주를 사용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에 들고 엄지손가락을 이용하여 불.법.승 삼보의 명호를 부르면서 하나씩 앞으로 넘깁니다. 불보살께 예배할 때는 팔에 감거나 목에 걸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합장주라고 하여 일반적인데, 이는 108번뇌를 끊는다는 의미이며 최승주(最勝珠)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삼보사찰
우리나라 불교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삼보사찰은 각각 불.법.승의 삼보를 상징하는 사찰입니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양산 통도사는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와 가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입니다.부처님 전신사리를 모신 탑이 법당 뒤에 있으므로 우리나라 불보종찰인 통도사 대웅전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습니다. 신라시대 순응,이정 두스님이 창건하였다는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목판에 새겨놓은 고려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법보사찰입니다. 해인(海印)이란 모든 사물의 그림자가 넓고 큰 바다에 거울처럼 두루 비치듯이 부처님의 드넓은 지혜와 바다에 온갖 법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신라시대 혜린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승주군 조계산의 송광사는 옛부터 덕높은 국사를 많이 배출하여 그 국사들의 영정을 모신 승보사찰이라 합니다.송광(松廣)이란 송광사가 자리잡고 있는 조계산에서 열여섯 분의 훌륭한 스님이 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이후 진각 ,청진,진명국사 등 열여섯 분의 영정이 국사전에 모셔져있습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사찰 건물 가운데 하나를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합니다.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영치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내리 설악산 봉정암에 있는 적멸보궁,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법흥사에 있는 적멸보궁 강원도 정선군 고한리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이 그것입니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시대에 자장(慈藏)스님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며, 정암사의 보궁에 봉안된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왜적을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입니다.

예경이란
부처님께 예경하는 첫 번째의 단계가 절입니다. 절은 겸손한 마음과 경건한 마음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절을 하는 것은 바로 교만하기 쉬운 자신의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참나에게 공경하는것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절에 가면 부처님 앞에 절을 세 번 올리게 됩니다. 이것은 몸과 마음으로 짓는 잘못을 뉘우치고 청정하게 하겠다는 뜻으로 절을 하며 불.법.승 삼보께 귀의한다는 뜻으로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절에 가면 부처님과 보살님, 그리고 성현들께 각각 3배를 하게 됩니다. 108배나 그이상을 하여도 그 내용은 삼보에 대한 예경입니다.

조석예불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차례씩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부처님과 여러 보살께 예경 드리는 것을 조석예불이라 합니다. 아침예불은 새벽 동이 틀 무렵에, 저녁예불을 해가 질 무렵에 드리는 것이 적당합니다. 불자들은 아무리 바쁘고 피곤하더라도 조석예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불은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의미를 지닌 것이며 자신을 위한 수해의 의미도 함께 지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불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 행합니다. 첫번째로 오분향례(五分香禮)는 삼보에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올리며 예를 드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독경(讀經)은 일반적으로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을 소리내어 읽으며 그 뜻을 음미합니다. 세 번째로 발원(發願)은 아침에는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중생을 위한 자비의 하루가 되기를 서원합니다. 저녁에는 하루의 업을 참회하며 무사히 하루를 보내게 해주신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하고 내일을 위해 발원합니다. 이상이 조석예불의 순서입니다. 때때로 아침예불에는 오분향례 대신 청정한 마음을 차(茶)에 담아 예를 올린다는 의미를 지닌 다게(茶偈)로 오분향례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오관게(五觀偈)
불자가 공양 할 때, 먼저 합장하고 부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고 오관게의 뜻을 관(觀)하며 공양합니다. 1.계공다소 양피래처(計功多少 量彼來處, 이 밥이 올 때까지 공덕을 생각 할진데) 2.촌기덕행 전결응공(村己德行 全缺應供, 덕행이 부족한 나로써 먹기가 송구하다) 3.방심이과 탐등위종(防心離過 貪等爲宗, 식사에 염탐하면 삼독도 구축되나니) 4.정사양약 위료형고(正思良藥 爲療形枯, 생사를 멸하는 양약으로 생각하면서) 5.위성도업 응수차식(爲成道業 應受此食, 도업을 이루기 위하여 이 음식을 먹는다)

불공이란
불공(佛供)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供養)입니다.공양이란 원래 공급(供給), 자양(資養)의 의미입니다. 즉 음식이나 의복 등의 물질로써 삼보에게 공급 자양하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원래는 사사공양(四事供養)이라 하여 옷.음식,아부자리,약을 공양하였습니다. 요즘은 향,초,꽃,차를 오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향,초,꽃등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번뇌를 제거하는 기능과 지혜로써 어두움을 밝히는 기능과 자비를 상징하는 기능을 의미합니다. 공양은 삼보에 대한 믿음과 믿음에 대한 내용을 갖추지만 또한 모두가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게 하는 방편적 의미도 담습니다 {화엄경}에서는 법공양이 으뜸이라 하였으며 법공양이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것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며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보리심(보리심)(菩提心)을 잃지 않는 것이다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관음재일.지장재일,미타재일 등 재일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재일이란 부정한 것을 멀리 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여러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정기적인 날을 뜻합니다. 1일은 정광불재일(正光佛齋日), 8일은 약사불재일(藥師佛齋日), 14일은 현겁천불재일(現劫千佛齋日), 15일은 아미타불재일(阿彌陀佛齋日), 18일은 지장보살재일(地藏菩薩齋日), 23일은 대세지보살재일(大勢地菩薩齋日), 24일은 관세음보살재일(觀世音菩薩齋日), 28일은 노사나불재일(盧舍那佛齋日), 29일은 약왕보살재일(藥王菩薩齋日), 30일은 석가모니불재일(釋迦牟尼佛齋日)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특히 많이 지켜지고 있는 재일은 24일의 관음재일과 18일의 지장재일입니다.

불교의 사대명절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사대명절은 부처님 오신 날인 음력 4월 8일, 출가재일인 음력 2월 8일, 성도재일인 음력인 12월8일, 열반재일인 음력 2월 15일입니다.이 가운데 부처님 오신 날은 불교 최대의 명절입니다.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일이기 때문입니다.

방생법회 의식 과 의미
살생을 금지한 불살생계는 가장 중시되는 계율이며, 방생(放生)은 불살생계를 좀더 적극적으로 지켜나가는 길입니다. 즉 살생을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죽게 된 생명을 구해냄으로써 보다 넓은 의미의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불살생계와 마찬가지로 방생은 불자가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하는 의무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경전에는 항상 방생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방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짐승을 죽이는 것을 보았을 때는 마땅히 방편을 써서 죽게 된 짐승을 살려주어야 한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병이 났을 때 사찰에서 행하는 구병시식
구병시식(救病施食)이란 병에 걸린 사람을 위하여 사찰에서 행하는 일종의 재례식으로서, 시식(施食)이란 지옥에서 굶주린 고통받는 가엾은 고혼들에게 공양물을 베풀어 그들의 원한을 달래는 일입니다.

천도재란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나
죽음과 관련한 불교의례를 천도재 (薦度齋)라고 합니다.다시 말해 천도재란 죽은 사람을 위하여 불교에서 올리는 재례의식들의 총칭으로 수륙재나 49재, 영산재 등이 모두 천도재에 속하는 것들인데,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모든 악업이나 원한관계 등을 해소하는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돕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49재는 어떻게 지내며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나
49재란 사람이 죽은지 49일째 되는 날에 지내는 재로서, 하필 49일째 되는 날 거행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견해가 사람이 죽으면 인연에 의해 다음 생을 받기까지 중유의 상태에 머물며 그 기간이 길어야 49일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영가에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일깨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도록 하고 명복을 비는 일도 그 전에 행해야 하지만, 영가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날이 언제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죽은 이에 대한 추모의례를 최종적으로 49일째 되는 날 행하는 것입니다.

재가신자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
계율을 지키는 것은 부처님의 행 즉, 깨달음의 행을 닦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행을 행하며 부처님 공덕을 마음에서 이루면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올바른 수행이라 할 것입니다. 재가신자가 계율로서는 대표적인 것으로 오계와 칠불통계(七佛通戒), 삼귀의계(三歸依戒), 보살계(菩薩戒)등이 있습니다. 오계는 첫째 생명을 존중하고 억압하거나 죽이지 말라는 것이며 둘째 아낌없이 베풀어주고 결코 남의 물건을 빼앗지 말라는 것이며, 셋째는 청정행을 할 성이요 결코 사음을 하지 말며, 넷째는 진실한 말을 하고 망령된 말을 하지 말며, 다섯째는 바른 마음을 지키고 술에 취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칠불통계는 과거 비바시 부처님으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에 이르기까지의 일곱 부처님이 모두 전승하여 온 함축된 계입니다. 즉 󰡐모든 나쁜 짓 하지 말고 온갖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교단에 귀의합니다.

참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참(懺)라고 하고, 앞으로 닥쳐올 잘못을 미리 예방하는 것을 회(悔) 라고 합니다. 참회는 근본적으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말끔히 비우는 것을 뜻합니다. 나에 대한 집착 때문에 대립하고 그 사이에서 미워하고 원망하고 노여움도 갖습니다. 참회에서 그 마음을 말끔히 비울 때 거짓된 나에 대한 집착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행에서는 참회를 하여 마음을 비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의 기도시간을 정하여 일심으로 수행하는 가운데 참회해야 합니다.

108배, 천배, 만배 등을 하는 이유
오랜 전생부터 지어온 온갖 죄업과, 현생에 길들여진 나쁜 가치관이나 습관들을 너무나 두터워 쉽게 그 업장을 소멸시키기 어렵습니다. 오랜 생 동안 익힌 탐욕과 갈애는 잠깐 동안의 기도나 몇 번의 선행으로 가라앉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살려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믿음과 부처의 가피력을 입으려는 믿음의 표현으로 간절히 그리고 오래도록 기도한다면 전생업을 청산하고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은 참회나 기도의 방법 가운데 불.보살님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번의 절에도 공덕이 있으므로 천배, 만배에 이르러서 그 수행의 공덕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여러번 절을 하는 가운데 신체의 관절이 순리대로 꺾이듯이 자신의모든 아만이 저절로 꺾이게 되고 자기 겸손에서 오는 경건한 마음이 항상 일어나며 절하는 순간순간 서원과 원력을 세우므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이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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