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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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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발 작성일12-03-14 20:08 조회4,2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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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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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괴로움 중에서 가장 두려운 고통은 무엇일까? 틀림없이 그것은 죽음에 직면한 고통이다. 부귀와 권력을 누렸던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치듯 애를 썼지만 그도 역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무병장수를 꾀한다는 중국의 도인들도 결국에는 풀잎 끝의 이슬에 불과했다. 죽음과 그 죽음에 이르는 병은 모든 인간을 절망케 한다. 죽음, 그것은 인간의 한계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이란 인간 존재를 암울하게 만드는 가장 처절한 고통이라는 상징적 의미마저 지니는 것이다. 그러한 엄청난 고통으로서의 죽음이 우리 곁에서 서성거리며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그러나 진정 인간이란 죽음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생은 무의미해질 게 아닌가. 그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있으리라. 하여 이러한 고통과 악으로 오염된 세계, 시시각각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유한성의 자각은 마침내 그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여 자신있게 죽음을 극복하는 자력(自力)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로 전개된다. 석가모니불은 자력으로 죽음을 극복한 모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력으로서 깨달음을 얻어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 비록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힘없는 중생들에게 그것은 한없이 멀고 힘에 벅찬 여정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아니 비단 그런 사람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누구나 그렇게 연약한 일면이 있으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절대적 능력을 지닌 이의 힘을 빌어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틈엔가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지금 말하려는 아미타불은 인간의 한계상황인 죽음을 물리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부처님일뿐더러 죄업의 고통으로 절망하는 나약한 중생의 의지처로서 무한한 생명의 빛으로 다가온다. 그분은 서방 정토극락 세계의 교주로서 죽음의 고통에서 인간을 구제해 주는 님이며 믿고 의지해야 하는 절대 타자로서 무한한 빛이요, 생명의 님인 것이다. 아미타 붓다(Amita Buddha)라는 아미타불의 산스크리트 원어는 그래서 아미타바 붓다(Amitabha Buddha) 혹은 아미타유스 붓다(Amitayus Buddha)로도 쓰인다.
 

아미타바는 한량없는 빛을, 아미타유스는 한량없는 수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자를 무량광불(無量光佛), 후자를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부른다. 이 두 가지 이름에 대해 최근 학계에서는 '아미타바'라는 이름이 선행하고 후에 '아미타유스'가 사용되었다는 설과 그 반대라는 설, 그리고 원래는 각각 별개의 그룹에서 각각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다가 정토교(淨土敎) 경전에서 이 양자가 통일되었다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화엄경]의 비로자나불도 광명의 부처님, 혹은 무한한 생명의 부처님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명호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그러한 부처님의 보편적인 성질을 구원의 빛과 생명의 빛으로 특수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삶에 지친 인간들이 죽음의 절망, 그 엄청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미타부처님을 그러한 성질을 지닌 최고의 님으로 섬기게 된 것이다. 무량수전이며 미타전에 아미타 구품인(九品印)을 한 채 자비로운 미소를 보내고 있는 아미타불, 그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싹트게 되었는지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석가모니 생애 말년의 일이다. 마가다 국의 태자 아자타샤트루는 석가모니의 사촌 형제 데바닷다의 꼬임에 넘어가 부친 빔비사라 왕을 몰아 내고 왕위를 찬탈했다. 뿐만 아니라 부왕을 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음식물 반입을 금지했다. 아자타삿투의 모친이자 왕비인 베데히 부인은 몸을 깨끗이 씻고 나서 우유와 꿀로 반죽죽한 것을 몸에 바르고 품 속에 포도주를 넣어 가지고는 감옥으로 들어가 그 반죽을 왕에게 주어 주림을 면하게 하였다.
 

부왕이 굶어 죽기는 커녕 오히려 날로 건강을 되찾기 시작하자 이를 수상히 여긴 아자사삿투는 그것이 어머니의 소행임을 알아차리고 모친을 죽이려 했으나 중신들의 간곡한 만류로 골방에 감금한 채 출입을 못하게끔 감시하였다. 부인은 분함과 억울함, 슬픔과 절망에 쌓여 몸부림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골방에 갇힌 베데히 부인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부처님 뵈옵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그렇게 기원하자 부처님께서는 목건련 존자와 아난 존자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 주변에는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이 허공에서 하늘꽃을 눈송이처럼 뿌려 부처님을 공양하고 있었다. 감격한 부인은 흐느끼면서 가르침을 청한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무슨 업보로 이와같은 불효막심한 자식을 두게 되었나이까? 저는 이 천박하고 악독한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청컨데 저에게 깨끗한 세계를 보여주시옵소서."
이에 석가모니불은 극락정토를 보여주고 간절히 아미타불을 염하면 그분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하신다.
 

이상이 바로 [관무량수경] '서분(序分)'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며, 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고려 불화의 '관경변상도 서분'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죄악이 깊고 깊어 끊임없이 번뇌의 불길이 그칠 줄 모르고 일어나는 존재이다. 이렇게 번뇌를 갖춘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떠한 수행으로도 생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정토불교에서는 인간이란 지옥에 가는 일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아무리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악의 구렁텅이 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한다." "나는 비참한 인간이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인가." 불경에서도 말한다. "남의 눈에 보이는 겉모습은 현명하고 착하며 정진하는 것 같지만 탐욕과 분노와 삿됨이 많은 까닭에 간특함이 몸에 가득하다."
 

아미타불이 존재하는 이유는 망자(亡子)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러한 중생들을 구원하는 데 있다.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창시자 신랑(親鸞)은 이런 말을 했다. "선인(善人)도 왕생하는데, 하물며 악인(惡人)이랴." "악한 사람도 왕생하는데 하물며 착한 사람이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악인이야말로 아미타불이 구제할 대상이기 때문이다.악인이 없으면 아미타 부처님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연약한 심성의 소유자나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중생에게는 오로지 부처님께 의지하는 타력 왕생의 길밖에는 구원의 빛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법장 비구의 48대원
 

그런데 아미타불의 탄생의 비밀을 살펴볼 즈음에는, 거기서 타력과 자력의 불가분리적인 상호 긴장감 넘치는 움직임이 솟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미타불은 한 중생인 인간이 대원(大願)을 세워 수행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의하면 아득한 먼 옛날 세자 재불(世自在佛)이 계실 때, 지혜가 뛰어난 한 왕이 있었다. 그 왕은 세자 재불로부터 법문을 듣고 크게 감복하여 모든 부귀와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다. 그가 바로 법장(法藏,Dharmakara) 비구다. 그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스스로 붓다가 되기 위해서 48가지 대원을 세웠다.
 

그 원 하나하나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이타행(利他行)으로 가득차 있다. 48대원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극락에 왕생하는 사람 모두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이상적인 인격으로 실현시키리라는 원이다. 둘째는 극락으로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리라는 원이다. 그리고 셋째 정토를 실현하리라는 원이다. 48대원 모두가 간절하지만 특히 제18원이 가장 인상적이다.
 

제가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적에, 시방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제 나라에 태어나지 못한 중생이 하나라도 있다면, 저는 차라리 깨달음을 다 이루지 않고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원을 세우고 수행한 결과, 결국 한 인간 법장 비구는 깨달음을 얻어 극락 정토의 주인 아미타 부처님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중생을 구하려는 간절한 원을 세우고 수행 정진한다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자력의 일면과 그러한 부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는 타력의 일면이 궁극에 가서는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문용어로 말하면 장엄정토(莊嚴淨土)와 원생정토(願生淨土)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즉 정토를 장엄하는 보살의 행이 바로 정토에 왕생하는 중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정토를 장엄하는 보살이 있기 때문에 정토에 왕생하는 중생이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정토에 왕생한 중생은 정토를 장엄하는 보살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타력을 강력히 추구하는 정토 왕생 신앙의 이면에도 자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토에 태어난 자가 보살로서 수행하여 붓다가 되는 마당에는 어디까지나 자력 성불이지만, 아미타불께 완전히 자신을 내맡겨 정토에 왕생하기까지는 절대 타력에 몸을 실어야 한다. 정토에 도달하기까지는 어찌됐든 나 자신의 자력적인 힘을 완전히 버린 상태에서 오직 아미타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에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무거운 업보 때문에 고()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가라않을 수밖에 없는 죄업 중생은 아미타불의 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하게 된다.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의 비유처럼 "큰 돌은 물에 뜨지 않고 가라않게 되기마련이지만, 아무리 큰 돌도 배에 실음으로써 물에 뜰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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