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바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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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발 작성일12-03-13 07:25 조회4,429회 댓글0건본문
..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바른 길
중도(中道)
어느 마을에 망고나무밭을 세 군데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어 아들들을 불러 놓고 자기가 없는 동안 망고나무 돌보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망고나무는 물을 많이 먹어야 맛있는 망고를 맺을 수 있다. 그러니 잊지 말고 매일 나무 한 그루 당 한 양동이의 물을 주도록 해라. 첫째는 뒷산의 밭을 담당하고, 둘째는 개울 건너 밭을 맡고, 셋째는 모퉁이 밭을 책임지도록 해라. 매일 실수 없이 해야 맛있는 망고를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식구가 일 년 동안 먹을 양식도 그 곳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라.
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뒤 아들들은 아버지가 시킨 일을 처리할 방법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매사에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첫째는,
나무의 크기가 다 제 각각인데 어떻게 똑같이 물을 주라고 하시는 거지? 내 생각에는 나무의 높이와 굵기, 그리고 뿌리의 크기까지 알아서 거기에 맞게 물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둘째와 막내 생각은 어떠냐?
게으른 둘째는,
어떻게 그 많은 나무에 매일 한 양동이씩 똑같이 줄 수가 있어? 어차피 그 나무들이 다 먹을 물이니까 한꺼번에 다 주고 말지 뭐.
사려깊은 셋째는
아버지는 평생을 망고나무 가꾸기에 바쳐온 분이야. 그렇기 때문에 망고나무를 잘 가꾸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셔. 나는 아버지가 시키신 대로 매일 한 나무에 한 양동이씩 주는 것이 좋겠어.
의견을 모으지 못한 채, 세 아들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큰아들은 합리적인 자신의 머리를 믿고 나무의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먼저 나무의 크기를 일일이 재는데 하루가 걸렸다. 다음 날은 나무의 굵기를 재는데 또 하루가 걸리고, 그 다음에는 뿌리까지도 파악해야 한다며 일일이 뿌리를 뽑아 그 굵기며 길이를 재었다.
둘째 아들은 게으른 성격대로 망고나무가 일주일 먹을 분량의 물을 한 번에 다 주고 내리 쉬었다. 셋째 아들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매일 한 그루에 한 양동이씩의 물을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와 세 아들을 데리고 망고나무밭을 돌아다니며 살펴보았더니, 큰아들이 맡았던 밭의 망고나무는 다 말라버렸고 둘째 아들의 망고는 썩어버렸는데, 셋째 것만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흔히들 중도(中道)하면 길의 가운데 또는 가운뎃길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중도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예화 중의 하나가 바로 망고나무에 물주는 법을 말하고 있는 위의 이야기다.
중도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 맨 처음 설하신 것이며, 따라서 매우 중요한 법문이고 부처님 교화활동의 끝에서도 들을 수 있는 설법 내용이다. 중도는 인도말 madhyama-pratipad의 중국적인 번역어로서 두 극단을 떠나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른 길을 말한다. 유교에서는 비슷한 개념으로 중용(中庸)을 쓰고 있다.
중국의 정명도에 의하면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 중의 이치는 지극하여 중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하기에 불충분하므로 중용이라 한다고 했다. 치우치지도 않고 바꾸지도 않는 것이라면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중도의 개념에 합치한다. 중도는 바른 길[正道]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있다[有] 또는 없다[無]는 두 극단에 의해 뒤바뀌어 있다. 갖가지 경계를 가져서 헤아리고 집착한다. 가전연이여, 만일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不受], 갖지 않으며[不取], 나에 집착하지 않고[不住], 나를 헤아리지 않으면[不計], 이 괴로움이 생길 때 생기더라도 멸할 때가 되면 멸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으며, 남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알면 이를 일러 여래가 설하는 바른 견해라고 한다. 가전연이여, 세상의 발생을 진실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세상이 없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고, 세상의 소멸을 진실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세상이 있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는다. 가전연이여, 부처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설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는 것이다.
<<잡아함 제10권 262경>>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아난다가 천타(闡陀) 비구에게 전한 내용 중에 나오는 말씀이다.
역시 중도의 의미는 바른 길 즉 정도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중도 이해의 예화인 소모나의 거문고 비유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남들보다 앞서기는커녕 같이 가기도 힘들었던 소모나는 그 상황을 매우 괴로워하고 극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의 노력을 안타까이 여긴 부처님께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출가 전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조금요.
그 거문고의 줄을 너무 죄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너무 느슨하게 풀면?
그 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나던가?
너무 죄거나 늦추지 않고 알맞게 줄을 골라야 소리가 잘 났습니다.
수행도 그렇다. 너무 조급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면 게으르게 되는 것이다
중도(中道)
어느 마을에 망고나무밭을 세 군데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어 아들들을 불러 놓고 자기가 없는 동안 망고나무 돌보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망고나무는 물을 많이 먹어야 맛있는 망고를 맺을 수 있다. 그러니 잊지 말고 매일 나무 한 그루 당 한 양동이의 물을 주도록 해라. 첫째는 뒷산의 밭을 담당하고, 둘째는 개울 건너 밭을 맡고, 셋째는 모퉁이 밭을 책임지도록 해라. 매일 실수 없이 해야 맛있는 망고를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식구가 일 년 동안 먹을 양식도 그 곳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라.
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뒤 아들들은 아버지가 시킨 일을 처리할 방법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매사에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첫째는,
나무의 크기가 다 제 각각인데 어떻게 똑같이 물을 주라고 하시는 거지? 내 생각에는 나무의 높이와 굵기, 그리고 뿌리의 크기까지 알아서 거기에 맞게 물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둘째와 막내 생각은 어떠냐?
게으른 둘째는,
어떻게 그 많은 나무에 매일 한 양동이씩 똑같이 줄 수가 있어? 어차피 그 나무들이 다 먹을 물이니까 한꺼번에 다 주고 말지 뭐.
사려깊은 셋째는
아버지는 평생을 망고나무 가꾸기에 바쳐온 분이야. 그렇기 때문에 망고나무를 잘 가꾸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셔. 나는 아버지가 시키신 대로 매일 한 나무에 한 양동이씩 주는 것이 좋겠어.
의견을 모으지 못한 채, 세 아들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큰아들은 합리적인 자신의 머리를 믿고 나무의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먼저 나무의 크기를 일일이 재는데 하루가 걸렸다. 다음 날은 나무의 굵기를 재는데 또 하루가 걸리고, 그 다음에는 뿌리까지도 파악해야 한다며 일일이 뿌리를 뽑아 그 굵기며 길이를 재었다.
둘째 아들은 게으른 성격대로 망고나무가 일주일 먹을 분량의 물을 한 번에 다 주고 내리 쉬었다. 셋째 아들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매일 한 그루에 한 양동이씩의 물을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와 세 아들을 데리고 망고나무밭을 돌아다니며 살펴보았더니, 큰아들이 맡았던 밭의 망고나무는 다 말라버렸고 둘째 아들의 망고는 썩어버렸는데, 셋째 것만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흔히들 중도(中道)하면 길의 가운데 또는 가운뎃길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중도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예화 중의 하나가 바로 망고나무에 물주는 법을 말하고 있는 위의 이야기다.
중도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 맨 처음 설하신 것이며, 따라서 매우 중요한 법문이고 부처님 교화활동의 끝에서도 들을 수 있는 설법 내용이다. 중도는 인도말 madhyama-pratipad의 중국적인 번역어로서 두 극단을 떠나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른 길을 말한다. 유교에서는 비슷한 개념으로 중용(中庸)을 쓰고 있다.
중국의 정명도에 의하면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 중의 이치는 지극하여 중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하기에 불충분하므로 중용이라 한다고 했다. 치우치지도 않고 바꾸지도 않는 것이라면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중도의 개념에 합치한다. 중도는 바른 길[正道]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있다[有] 또는 없다[無]는 두 극단에 의해 뒤바뀌어 있다. 갖가지 경계를 가져서 헤아리고 집착한다. 가전연이여, 만일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不受], 갖지 않으며[不取], 나에 집착하지 않고[不住], 나를 헤아리지 않으면[不計], 이 괴로움이 생길 때 생기더라도 멸할 때가 되면 멸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으며, 남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알면 이를 일러 여래가 설하는 바른 견해라고 한다. 가전연이여, 세상의 발생을 진실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세상이 없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고, 세상의 소멸을 진실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세상이 있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는다. 가전연이여, 부처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설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는 것이다.
<<잡아함 제10권 262경>>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아난다가 천타(闡陀) 비구에게 전한 내용 중에 나오는 말씀이다.
역시 중도의 의미는 바른 길 즉 정도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중도 이해의 예화인 소모나의 거문고 비유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남들보다 앞서기는커녕 같이 가기도 힘들었던 소모나는 그 상황을 매우 괴로워하고 극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의 노력을 안타까이 여긴 부처님께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출가 전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조금요.
그 거문고의 줄을 너무 죄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너무 느슨하게 풀면?
그 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나던가?
너무 죄거나 늦추지 않고 알맞게 줄을 골라야 소리가 잘 났습니다.
수행도 그렇다. 너무 조급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면 게으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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