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하루 일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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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발 작성일12-03-13 07:14 조회4,266회 댓글0건본문
붓다의 하루 일과표
붓다는 반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45년간이라는 기간을 쉬지 않고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한 사람이라도
苦 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苦 에서 벗어나게 하기 모든 진리를 숨김없이 가르쳐 주고자 했으며.
자신을 신격화하여 높은 자리에 앉거나 군림 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청정하게 모든 출가자들과
중생들과 똑같이 좋은 친구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 매김을 했다.
붓다의 하루 생활은 육체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자신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불법을 가르치는데 보냈습니다.
붓다의 홀로 있을 때의 내적 삶은 주로 구도자로서의 끊임없는 수행과 그 기쁨(열반)을 경험하는
것이었고, 외부적으로 활동적인 삶은 모든 중생들을 윤리적 도덕적 삶을 살아가게 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한단계 보다 성숙된 진리의 빛을 보게하기 위한 대자비심을 베푸는 생활 이었다.
붓다 그 분은 최선을 다해서 중생들이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분이셨다.
붓다의 하루 생활은 크게 다섯으로 구분된다. ⑴오전 ⑵오후 ⑶초저녁 ⑷한밤중 ⑸새벽녘
⑴ 오전 (오전4시∼12시)
붓다는 새벽4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자신의 침구를 정리하고 5시까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명상을 하였다.
5시부터 6시까지는 붓다의 천리안(mental eye) 으로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둘러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도와주시거나 또는 그 사람의 앞에 나타나는 신통력을
이용 하시기도 했다.
6시가 되면 가사를 걸치고 제자들과 함께 마을로 가셨다. 물론 이때 이른 아침에 마을에 가시는
주요 목적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였다. 붓다는 제자들과
또는 홀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즉시 그곳으로 달려 갔다.
재가자들로 부터 점심 공양 초대가 없는 날이면 제자들과 직접 발우를 들고 집집마다 탁발을 하였다.
경전에는 이때 붓다의 탁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붓다는 집과 집을 다니면서 대문앞에서 눈을 땅에 고정시키고 발우를 조용히 들고 있었으며
재가자들은 음식을 발우에 담아 드렸다. 물론 어떠한 음식을 발우에 넣더라도 붓다께서는
이를 거절 하시지 않으셨고 좋다 나쁘다 말하지 않았다."
팔십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먹을 음식을 얻기 위해 직접
탁발을 다녔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음식을 대신하여 탁발 받아 오도록 시키지 않았다.
붓다는 정오 전에 공양을 마쳤다.
⑵ 오후 일과(12시∼오후 6시)
공양을 하신 후 처소에 돌아오면 수행승들이 붓다를 찾아 뵙고 수행중 생긴 의문이나 또는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해서 붓다께서 자세히 설법을
해 주셨다. 또한 각자에게 맞는 수행법과 명상의 주제들을 받아 지녔다.
수행승들이 돌아가고 나면 다시 처소에서 대자비 삼매(Mahakaruna Sannpatti)에 들어가서
붓다의 혜안으로 세간사를 살폈으며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곳을 달려 갔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늦은 오후쯤 되면 자신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대중들이 모여 있는
(재가신도와 수행승들) 법당으로 가시어 그들을 위해서 법문을 하셨다. 붓다는 불안(佛眼)으로
각자의 타고난 기질과 근기를 파악해서 법문을 하셨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지위가 높고 낮은 자등
여러층의 중생들이 모두 모였지만 붓다의 법문은 그들 각각 개개인의 근기에 맞게 특별히 와 닿게끔
그리고 쉽게 이해가 되도록 하셨다.
이것은 법을 가르치는 붓다의 탁월한 방법이었다. 붓다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제자들과의
차이는 바로 중생들을 교화하는 능력의 차이기도 하다.
평범한 자들에게는 보시와 오계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베풀고 지킴으로써 얻는 공덕을 가르쳐
주시고 , 이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 들인 사람들에게는 팔정도와 출가의 공덕에
대해서 설법을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성제의 진리를 가르친다. 이러한 붓다의 설법
방법을 점진적 설법이라고 하며 이는 붓다가 45년간 지켜온 설법의 원칙이었다.
⑶ 초저녁(저녁 6시∼10시까지)
이 시간에는 주로 비구들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는데 비구들은 자유롭게 붓다에게 가서 법의
심오한 부분을 질문하여 의심나는 것을 풀고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받으면서 법의
가르침을 들었다.
또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반인들이 붓다를 찾아와 설법을 듣기도 했다.
⑷ 한밤중 (밤 10시∼새벽 2시까지)
이 시간에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에 있는 천신이나 범천이 내려와서 붓다에게
법을 질문하고 설법을 들었다.
상응부 경전에 보면 "그때 하늘의 천신들이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사방을 두루 밝히며
붓다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붓다께 예배를 올리고 한 쪽으로 조용히 물러섰다" 라는
구절이 곳곳에 나온다.
⑸ 새벽녘 (오전 2시∼4시까지)
오전 2시부터 3시 사이에는 천천히 걷는등의 가벼운 운동을 하셨다.
3시부터 4시 사이에는 오른편으로 누워서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로 잠을 자다.
붓다는 뭇 중생들과는 달리 45년 평생을 단 1시간만 잠을 잤다. 그리고 조용한 시간이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유정물.중생)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하도록 사랑 (Metta)의
마음을 보냈다. (자비관 수행에 보면 자비의 마음을 다른 유정물들에게 보네는 부분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음. 우리 일반인들도 가능한 방법임)
붓다께서는 스스로가 45년간 청빈한 삶을 살아 가면서도 어떠한 물질적 불편도 느끼지 않았고,
공양하실 음식은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스스로 탁발에 의지 했었다.
장마철을 제외한(우기안거) 9개월 동안은 하루도 쉬지 않고 불법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다녔으며. 일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성스러운 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최고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중생의 세간사를 모두다 아시는 분의 하루 생활은 여든살이
나이에 대열반에 드실때 까지 오로지 모든 중생들의 행복과 안녕과 편안함을 위해서
보네셨던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오직 하나 즉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면서 한단계 높은
정신적 발전을 이루고 또한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보넬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라는
대자비심뿐이었다.
붓다가 보네신 45년간의 하루 하루는 언제나 바쁘고도 자비심에 넘치는 하루였다.
붓다는 반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45년간이라는 기간을 쉬지 않고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한 사람이라도
苦 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苦 에서 벗어나게 하기 모든 진리를 숨김없이 가르쳐 주고자 했으며.
자신을 신격화하여 높은 자리에 앉거나 군림 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청정하게 모든 출가자들과
중생들과 똑같이 좋은 친구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 매김을 했다.
붓다의 하루 생활은 육체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자신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불법을 가르치는데 보냈습니다.
붓다의 홀로 있을 때의 내적 삶은 주로 구도자로서의 끊임없는 수행과 그 기쁨(열반)을 경험하는
것이었고, 외부적으로 활동적인 삶은 모든 중생들을 윤리적 도덕적 삶을 살아가게 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한단계 보다 성숙된 진리의 빛을 보게하기 위한 대자비심을 베푸는 생활 이었다.
붓다 그 분은 최선을 다해서 중생들이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분이셨다.
붓다의 하루 생활은 크게 다섯으로 구분된다. ⑴오전 ⑵오후 ⑶초저녁 ⑷한밤중 ⑸새벽녘
⑴ 오전 (오전4시∼12시)
붓다는 새벽4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자신의 침구를 정리하고 5시까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명상을 하였다.
5시부터 6시까지는 붓다의 천리안(mental eye) 으로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둘러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도와주시거나 또는 그 사람의 앞에 나타나는 신통력을
이용 하시기도 했다.
6시가 되면 가사를 걸치고 제자들과 함께 마을로 가셨다. 물론 이때 이른 아침에 마을에 가시는
주요 목적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였다. 붓다는 제자들과
또는 홀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즉시 그곳으로 달려 갔다.
재가자들로 부터 점심 공양 초대가 없는 날이면 제자들과 직접 발우를 들고 집집마다 탁발을 하였다.
경전에는 이때 붓다의 탁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붓다는 집과 집을 다니면서 대문앞에서 눈을 땅에 고정시키고 발우를 조용히 들고 있었으며
재가자들은 음식을 발우에 담아 드렸다. 물론 어떠한 음식을 발우에 넣더라도 붓다께서는
이를 거절 하시지 않으셨고 좋다 나쁘다 말하지 않았다."
팔십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먹을 음식을 얻기 위해 직접
탁발을 다녔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음식을 대신하여 탁발 받아 오도록 시키지 않았다.
붓다는 정오 전에 공양을 마쳤다.
⑵ 오후 일과(12시∼오후 6시)
공양을 하신 후 처소에 돌아오면 수행승들이 붓다를 찾아 뵙고 수행중 생긴 의문이나 또는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해서 붓다께서 자세히 설법을
해 주셨다. 또한 각자에게 맞는 수행법과 명상의 주제들을 받아 지녔다.
수행승들이 돌아가고 나면 다시 처소에서 대자비 삼매(Mahakaruna Sannpatti)에 들어가서
붓다의 혜안으로 세간사를 살폈으며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곳을 달려 갔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늦은 오후쯤 되면 자신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대중들이 모여 있는
(재가신도와 수행승들) 법당으로 가시어 그들을 위해서 법문을 하셨다. 붓다는 불안(佛眼)으로
각자의 타고난 기질과 근기를 파악해서 법문을 하셨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지위가 높고 낮은 자등
여러층의 중생들이 모두 모였지만 붓다의 법문은 그들 각각 개개인의 근기에 맞게 특별히 와 닿게끔
그리고 쉽게 이해가 되도록 하셨다.
이것은 법을 가르치는 붓다의 탁월한 방법이었다. 붓다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제자들과의
차이는 바로 중생들을 교화하는 능력의 차이기도 하다.
평범한 자들에게는 보시와 오계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베풀고 지킴으로써 얻는 공덕을 가르쳐
주시고 , 이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 들인 사람들에게는 팔정도와 출가의 공덕에
대해서 설법을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성제의 진리를 가르친다. 이러한 붓다의 설법
방법을 점진적 설법이라고 하며 이는 붓다가 45년간 지켜온 설법의 원칙이었다.
⑶ 초저녁(저녁 6시∼10시까지)
이 시간에는 주로 비구들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는데 비구들은 자유롭게 붓다에게 가서 법의
심오한 부분을 질문하여 의심나는 것을 풀고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받으면서 법의
가르침을 들었다.
또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반인들이 붓다를 찾아와 설법을 듣기도 했다.
⑷ 한밤중 (밤 10시∼새벽 2시까지)
이 시간에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에 있는 천신이나 범천이 내려와서 붓다에게
법을 질문하고 설법을 들었다.
상응부 경전에 보면 "그때 하늘의 천신들이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사방을 두루 밝히며
붓다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붓다께 예배를 올리고 한 쪽으로 조용히 물러섰다" 라는
구절이 곳곳에 나온다.
⑸ 새벽녘 (오전 2시∼4시까지)
오전 2시부터 3시 사이에는 천천히 걷는등의 가벼운 운동을 하셨다.
3시부터 4시 사이에는 오른편으로 누워서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로 잠을 자다.
붓다는 뭇 중생들과는 달리 45년 평생을 단 1시간만 잠을 잤다. 그리고 조용한 시간이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유정물.중생)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하도록 사랑 (Metta)의
마음을 보냈다. (자비관 수행에 보면 자비의 마음을 다른 유정물들에게 보네는 부분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음. 우리 일반인들도 가능한 방법임)
붓다께서는 스스로가 45년간 청빈한 삶을 살아 가면서도 어떠한 물질적 불편도 느끼지 않았고,
공양하실 음식은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스스로 탁발에 의지 했었다.
장마철을 제외한(우기안거) 9개월 동안은 하루도 쉬지 않고 불법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다녔으며. 일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성스러운 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최고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중생의 세간사를 모두다 아시는 분의 하루 생활은 여든살이
나이에 대열반에 드실때 까지 오로지 모든 중생들의 행복과 안녕과 편안함을 위해서
보네셨던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오직 하나 즉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면서 한단계 높은
정신적 발전을 이루고 또한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보넬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라는
대자비심뿐이었다.
붓다가 보네신 45년간의 하루 하루는 언제나 바쁘고도 자비심에 넘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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